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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이 본 <고양이를 부탁해>
2001-10-05

내가 다니던 여고는 바닷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인천 앞바다의 언덕에 위치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을 하던 내게 학생부 선생이 내주던 벌은 황량한 운동장 바닥에 널부러진 잔돌들을 주워 오라는 것이었다. 벌도 주고, 학교 운동장 정리도 하려는 실속파 선생님….

여고시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춥고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던 운동장에서 게으른 여고생들이 곱은 손을 호호 불며 돌들을 주워담는 광경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면서 자유공원 뒷골목, 연안부두, 월미도 등 내가 학교를 벗어나면 늘 놀러다니곤 했던 공간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자연스레 내 여고시절이 떠올라 착잡했다.

착잡했던 이유는 영화내내 화면에서 뿜어내는 생기발랄한 스무살 어린 여자애들의 감성이 낯설어서였을 것이다. 그 시절이 너무 오래되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마치 한번도 그러한 감성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서 오는 상실감 같은 게 느껴졌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도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견제와 경계 속에 느껴지는 정서적 밀착감들이 왜 그리 나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던지….

하긴 그랬다. 요의도 없는 친구를 끌어내 화장실에 같이 가고 매점을 잠시 다녀 오더라도 팔장을 끼고 걸으며 그 시간이 아까워 히히덕거리며 다니던 아이들과 달리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편이긴 했다. <고양이…>는 나에게 아예 없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발현되지 못했던 그 시절의 섬세한 감성을 나에게 툭 마치 선물인 양 던져 놓았다.

정재은 감독의 전작 단편들 중에서 <둘의 밤>과 <도형일기>를 볼 기회가 있었고 장편데뷔작을 기대하고 있던 감독중의 하나이다. <고양이…>는 <둘의 밤>의 어린 여자아이들의 부숴질 듯한 미세한 감성과 <도형일기>의 주류사회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음울한 초상화를 혼합한 듯한 그러나 단편에서는 잘 감지하기 어려웠던 발랄함이 가미된 스타일로 풀어놓았다.

많은 사람중에 하필이면 <고양이…>의 관람평을 나에게 부탁한 의도중에는 내가 <세친구>의 감독이라는 점이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같은 `성장영화'를 만든 감독으로서 같은 여성감독이지만 남자아이들을 주요한 매개체로 이용한 `여성감독'으로서의 의견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친구>는 성장영화가 아니다. `여고생'에서 `여인'으로 넘어가는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그 다채로운 감정적 기복과 정서적 성숙과 좌절등이 반복되는 그 독특한 한 시대의 변주곡이 <고양이…>에는 있는 반면 <세친구>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무반주 첼로연주곡처럼 단조로운 저음의 울림만 있을 뿐이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고양이…>는 그 또래 아이들의 감성에 맞는 스타일을 찾아냈다. 화면의 아무 구석이나 당당하게 자리잡는 문자 메시지들…. 마치 그 또래 여자아이들 발걸음처럼 경쾌한 카메라며 너무 자연스러워 사랑스러운 연기들…. <세친구>가 일정한 거리두기를 전제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면 <고양이…>는 마치 그 아이들 중의 하나가 튀어나와 연출을 했을 것 같은 느낌으로 인물들과 정서적 일치를 만들어낸다.

정재은 감독의 연출노트를 보면 고양이를 키운적이 있고 그 고양이의 여러 가지 섬세한 정서적 반응들에서 이 영화의 모티브를 얻은 듯 하다. 나는 고양이도 좋아하지만 개를 더 좋아한다. 우직하지만 단순하고 변함이 없는…. <고양이…>와 <세친구>의 차이는 섬세함과 우직함의 차이가 아닐까 느껴졌다. 가벼운 주제, 감각적인 스타일, 외형적 물량주의에 경도된 요즘 데뷔작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자기의 색깔을 보기좋게 우려낸 정재은 감독의 영화를 부탁해!

임순례/영화감독, <세친구> <와이키키 브러더스>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