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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세상밖으로 가출 <고양이를 부탁해>
2001-10-05

◈스무살 여자의 세 표정

여상을 졸업하고 세상과 맞대면하게 된 세 여자. 스무살에 이들이 찾아야 하는 건 핸드폰이나 화장품 광고처럼 자신들의 이미지를 치장할 장신구가 아니라, 사회 속에 발디딜 좌표다. 각자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세 주인공이 저마다 힘들고 안쓰러워 보이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런 안쓰러움을 넘어서 이들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동지감을 준다.

혜주(이요원)에게 사회는 성취하고 인정받아야 하는 전쟁터이다. “평생 잔심부름만 하는 저부가가치 인간으로 살 수는 없어. 코도 높이고 영어공부도 하고, 반드시 성공할 거야.” 증권회사에 취직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한다. 여상 동창인 친구들에게는 무심하거나 쌀쌀맞을 때가 많다. 세속적이면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다. 외모에 신경쓰는 게 공주같을 때가 있고 실제로 예쁘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엔 그늘이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가 원하는 걸 이루기란 쉬울 것 같지 않다.

지영(옥지영)은 세상을 버티고 추스려 나가기가 버겁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판자촌에서 사는 지영은 공부도 잘 했고 디자인에 솜씨가 있지만 보증 설 사람이 없어 온전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한다. 갈수록 생활이 힘들어지는 데 더해 집 지붕마저 자꾸 내려앉으려 한다. 혜주와 학교 때 제일 친했지만, 졸업한 뒤에는 가장 소원해진다. 지영이나 혜주에게 세상은 정해진 사람들의 정해진 자리로 채워져 있다. 그 안에서 둘이 함께 할 자리는 없어 보인다.

태희(배두나)는 다르다. 겪어보고 싶은 게 많고 그래서 세상은 미지의 신대륙이다. “배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살 거야”라는 그에게 자기 몫의 자리란 큰 의미가 없다. 맥반석 체험실을 하는 아버지의 일을 돕지만 돈벌어 먹고 사는 걸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족들이 싫다. 뇌성마비 시인을 돕는 자원봉사를 하고, 불쌍해 보이는 외판원들이 파는 물건을 거절하지 못한다. 지영의 힘든 사정에도 가장 관심을 보인다. 이 몽상가가 가장 과격한 `사고'를 친다.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이 스무살 여자가 험한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데, 위태롭게 느껴지기보다 마음 속에서 박수를 보내게 되는 건 왜일까.

◈ 비로소 만나는 온전한 성장영화

`고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수 캣 스티븐스의 70년대 팝송 <와일드 월드>는 낯선 세계를 찾아 떠나는 여자에게 “오, 베이비 베이비 잇츠 어 와일드 월드”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항상 너를 소녀로 기억할 거야”라고 노래한다. 따뜻한 노래지만 소녀로 기억되는 걸 넘어 성인이 될 때 세상은 `험하다'는 형용사에 따라붙는 수동태로만 남아있을 수는 없다. 그 경계선의 나이, 스무살의 이야기에 고양이가 지닌 “애완동물과 야생동물 사이의 묘한 경계성”을 담고자 한 정재은(32) 감독이 담아낸 세상의 모습은 험하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한 영화 평균 30여곳인 로케 장소를 70여곳이나 찾아가 담아낸 인천과 서울의 풍경은 한곳 한곳마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득하다. 주인공들이 방파제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뛰어갈 때 그 바람을 함께 맞고 싶은 유혹이 인다. 화면 자체부터 활자매체로 표현할 수 없는 풍부한 디테일을 가지고 스무살의 가출을 허락한다. 그게 신인 여자 감독의 메시지여서 더 미덥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온전한 성장영화다. 성장을 다룬 대다수 영화나 소설에서 보여지듯, 하나의 주체로 세상과 맞대면하는 데 가출 만큼 분명하고 구체적인 계기는 없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가출을 피해갔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든 <친구>든 주인공 아닌 친구가 가출했고, 그래서 불완전한 성장의 후일담이 돼버렸다. 이 영화에서는 여자가, 여린 감성 그대로 간직한 채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 발걸음에 사실감이 배어나는 걸 보면 이 가출은 지금 시대의 한 징후를 먼저 감지해낸 것일지 모른다. <고양이…>는 올해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진취적인 영화로 꼽힐 것 같다.

◈배우들 한마디

-이요원이 본 혜주

“어두운 모습을 절대 친구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친구들 앞에서는 늘 밝고, 바쁘고, 행복한 모습만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속 혜주의 색깔은 다양하다.”

-배두나가 본 태희

“어떤 이유든 잡아서 열등감으로 만들어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보통의 20살의 모습이 아니고 은근히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지혜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옥지영이 본 지영

“고양이처럼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고집 세고 남을 경계하지만 실은 여리고 상처를 잘 받는 것 같다. 단지 사람들이 지영이를 고양이처럼 경계하는 것일 뿐이지.”

임범 기자 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