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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간다> 매혹적인 일상 그러나 함정이…
2001-10-09

하얗게 녹슨 기와지붕 위로 비가 내리고, 낙숫물 듣는 아래 낡은 창틀에 까만 가슴이 걸려 있다. 이 문장은 잘해 봤자 모순어법이거나 비문이다. <봄날은 간다>는 이런 식의 모순어법 혹은 비문으로 가득 찬 영화다. 물론 이미지를 먹고사는 영화에서 모순어법과 비문은 매혹인 동시에 함정이기도 하다. 이 모순어법은 연출력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 허진호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젊은 장인에 가까울 정도다. 게다가 사랑에 지치거나 목마른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참 위로가 될 것이고, 보고 나면 눈이 퉁퉁 부을 수도 있다. 또 가슴이 쓰리고 온화해진다.

녹음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는 강릉 방송국 아나운서 은수(이영애)와 만나 사랑하게 된다. 대밭을 휘감는 바람 소리와 깊은 밤 절간의 풍경 소리를 녹음하고,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구전 민요도 녹음한다. 그들은 주로 라면만 먹고 (술에 취하기는 해도) 술 먹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잠자리 모습까지는 보여 주지 않고, 한쪽이 바람이 나도 극악한 상황까지 가지는 않는다. 술에 취해 친구 택시를 타고 강릉까지 간 상우의 집은 이름만으로도 풋풋한 수색역 근처에 있고, 이혼한 은수는 푸른 바다가 보이는 강릉의 작은 아파트에 산다. 둘다 퍽 정감나는 곳에서 무척 진짜처럼 잠깐 살았다.

둘은 조용히 사랑하게 되고 아주 조금 다투다가 싱겁게 헤어졌다가는 영원히 헤어진다. 그 사이에는 상우의 치매 걸린 할머니, 오랫동안 홀아비로 살아온 아버지, 역시 혼자처럼 보이는 고모 등의 일상이 있다. 그들의 생활은 너무 리얼한 나머지 따라 살고 싶을 정도다. 둘의 사랑 또한 무척 진짜 같은, 누구라도 언젠가는 해봤음직한 행위와 대사로 가득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행동과 말을 무척 아꼈고, 우리들은 수다스러웠다는 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그 작고 적은 움직임을 통하여 정서가 담긴 공간과 시간의 슬픈 흐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다. 깊은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앞서 예로 든, 사건의 선택과 이야기 이음새의 작위성에 의해 전달되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일상성을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은밀하고 치밀한 모순어법으로 일상을 조제한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서 사용된 모순어법에 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표현법을 위하여 눈앞의 것들을 지나치게 모조하여 누구에게나 소중한 노스텔지어와 투박한 일상까지 팬시화 시켰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매혹을 쫓다가 함정에 걸린 셈이다. 예술사를 돌아보면, 화려함의 막바지에는 단순함이 오고 그것이 지나치면 화려함 혹은 정밀함이 다시 찾아온다. 또 사회적 상처가 너무 크면 자잘한 작은 상처가 훌륭한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순환 속에서도 진실 혹은 절절한 감정은 오랫동안 동의받을 것이다. 하지만 <봄날은 간다>는 절절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한 것은 아닐까?

이효인/ 영화평론가, 계간 <독립영화>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