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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센터 테러, 할리우드에 못준다
2001-10-10

인디 영화들, 폭력의 뿌리에 관한 정치 토론 재개

살아남은 자의 스트레스가 맨해튼을 짓누른 지난 3주간, 뉴욕 영화계는 잠시 시계 바늘을 멈춰야 했다. 수없이 봐오던 영화 속 테러의 스펙터클은 극장의 어둠을 나서면 잊혀졌지만, 무역센터 테러사건이 제공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펙터클’은 빠져나올 극장문도 없었다. 아마도 한동안 뉴요커들은 영화 속에서 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디어가 반복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나리오며 성미 급한 대통령의 전쟁선언은 익숙한 레퍼토리라고 치자. 도시 한쪽에서는 수천구의 시신이 아직도 철근더미 속에 묻혀 있는데, 다른 거리에선 일상으로 돌아간, 혹은 돌아가게끔 내몰린 사람들로 여전히 바쁜 하루가 지나간다. 강제된 일상 속의 비일상, 9월의 맨해튼은 순간순간 섬뜩해지는 초현실적 공간이었다.

9월25일, 뉴욕시가 캐널 스트리트 이남을 제외한 뉴욕시 전역에 영화촬영 허가를 내주기 시작하고, 뉴욕영화제와 IFP(인디펜던트 픽처 프로젝트) 마켓이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계도 그러나, 어제 같은 일상은 아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지난 봄 파업분쟁에 대비해서 영화제작을 서둘러 마무리한 상태이나, 인디영화계들은 사고로 촬영이 몇 주일씩 지연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일주일 이상 출입과 업무가 폐쇄된 맨해튼 남쪽 지역의 영화사들과 배급사들은 촬영도구를 건지랴 제작·배급 일정을 조정하랴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한편 극장가의 분위기는 할리우드와 인디영화계의 반응이 사뭇 대조적이어서 미국인들의 양면적인 심정을 반영하는 듯하기도 했다. 테러가 발생한 주말, 뉴욕에 개봉한 유일한 할리우드영화인 머라이어 캐리의 데뷔작 <글리터>가 도피성 오락을 찾던 뉴요커들에게 할리우드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했다면, 코레이 맥아비 감독의 <아메리칸 우주비행사>나 게리 번즈 감독의 <웨이다운타운>처럼 블랙코미디 성향이 강한 인디영화들은 개봉이 연기되었다.

그러나 사고 발생 일주일 뒤부터 정치적인 소재의 인디영화들이 일제히 개봉되고 각종 토론회가 줄이어, 정서적 공황의 와중에도 비판적 시각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리암>은 특히 타자에 대한 차별, 폭력의 문제를 다뤄 위험 수위에 다다른 미국 내 반아랍 정서를 곱씹게 한다. 이외에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자메이카에 끼친 경제적 여파를 고발한 스테파니 블랙 감독의 다큐멘터리 <삶과 빚>이나 이스라엘 건국 직후 20년간의 연대기를 추적한 <평화를 찾아서: 1948∼1967> 등은 테러사건을 정치적,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이 ‘영화 같은 스펙터클’도 언젠간 영화로 만들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우디 앨런은 말한다. 이번 사건을 영화화할 수 있는 힘은 할리우드의 상술이 아니라 인디영화계의 비판적 상상력이어야 한다고. 뉴욕=옥혜령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