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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통신] 필리핀 피가 자랑스럽다
2001-10-18

필리핀-아메리칸영화 <데뷰> 개봉까지, 게릴라식 제작·홍보방식 관심끌어

미국땅에 사는 필리핀인이 필리핀 동포들의 자본을 모아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는 ‘필리핀영화’일까 ‘할리우드영화’일까. “나의 영화는 할리우드영화”를 당당히 내세우는 한 필리핀-아메리칸 영화 청년의 씩씩한 행보가 이곳 영화 관객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른살 동갑내기인 진 카자욘 감독과 작가 존 마날 카스트로 콤비가 만든 <데뷰>는 지난 10월5일부터 LA의 6개 극장에서 상영중인 코미디영화다. 전통적인 필리핀 이민 가족으로서의 자신을 혐오하는 한 고교 졸업생이 동생의 18번째 생일파티를 치르면서 미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자신과 부모세대의 갈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본다는 내용이다. 필리핀 전통 대나무 춤과 힙합 댄스가 교차하고, UCLA 메디칼 스쿨에 장학생으로 아들을 보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바람과 칼 아츠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싶어하는 아들의 소원이 엇갈리는 영화는 이곳에서 거의 접할 기회가 없었던 필리핀-아메리칸들의 삶의 모습을 유쾌하게 그린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영화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의 게릴라식 홍보 방식이다. 진-존 콤비는 현재 자신의 영화가 상영중인 LA지역 6개 극장을 일일이 상영시간마다 돌며 관객을 만나고 있다. 7일 UCLA 근처 한 극장의 상영이 끝난 뒤 무대에 오른 카자욘 감독은 당당했다. “나의 영화엔 백인도 흑인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영화는 할리우드영화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필리핀-아메리칸 역시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관객에게 “돌아가서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더 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 가는 길에 CD나 티셔츠를 꼭 사주기 바란다. 한 사람의 입장료라도 더 모아야 이 영화가 한 군데서라도 더 개봉할 수 있고 그것이 미국영화의 민족적 다양성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당부했다.

이들의 게릴라식 영화 만들기는 제작비를 모으는 데서 시작됐다. 미리 만든 10분짜리 16mm 트레일러를 미국에서 성공한 필리핀 갑부에게 보여주며 기부를 권했지만, 거부당한 이들은 필리핀 블루칼라 동포들로부터 제작비를 모으기로 작정하고 미리 티셔츠나 모자 등의 상품을 팔면서 영화내용을 홍보해 제작비의 일부를 마련했다.

지난해 하와이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은 뒤 올해 3월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이들은 영화 상영 며칠 전부터 자원봉사자들을 동원, 근처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팩스를 보내거나 포스터를 붙이며 적극적인 홍보를 펼쳐 당일 극장을 매진시켰다. 이들의 당돌함은 필리핀 혼혈인으로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 딘 데블린(<패트리어트>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의 작가)을 불쑥 찾아갔던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그의 사무실에서 “왜 필리핀-아메리칸으로서 정체성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거냐. 당신은 필리핀임이 창피한가”라며 호통을 쳤고, 결국 이 유명 작가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도 계속 CD나 티셔츠, 책 등의 관련 상품을 부지런히 팔아서 극장 배급료를 마련해 한 극장 한 극장씩 늘려가겠다”는 이들 다부진 각오는 ‘할리우드 인디펜던트’로서 소수인종의 영화인들이 생존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던지고 있다.

LA=이윤정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