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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방> 주연 시나리오작가 출신 김해곤씨
2001-10-31

장현수 감독의 새 영화 <라이방>(11월3일 개봉)의 절정 부분은 두고 두고 곱씹게 만드는 감칠 맛이 있다. 친구사이인 세 택시 운전사가 저마다 돈많은 점쟁이 할머니 집을 털기로 하지만 막판에 셋 가운데 가장 소심한 해곤(김해곤)은 불참을 선언한다. 거사 당일 밤, 나머지 둘이 땀 투성이가 돼 겨우 문을 따고 할머니 집에 들어간다. 그때 해곤은 술에 잔뜩 취한 채 그 집을 찾아와 친구들의 이름을 고래고래 부른다. 넘어지고 벽에 부닥치고 난리를 떤다. 들킬까봐 어쩔줄 몰라하는 두 친구를 붙잡고 해곤은 말한다.

“야, 니들 정말 보고 싶었다. 나 반갑지?”

평생 철 들지 않을 것 같은 인간. 정 많고, 우스개 소리도 잘 하지만 도무지 고독할 줄 모르고 모진 판단을 못 내리는 이 인간은 친구들의 삶까지 다 소극으로 만들어 버린다. 주변에 있을 법한, 잘 연출된 이 캐릭터가 김해곤(37)씨의 연기로 더욱 뚜렷한 생명력을 얻어 소극 <라이방>의 리얼리티를 더욱 강화한다.

“장 감독이 평소 니 모습 그대로 연기하라고 했다. 다만 살을 더 찌워야 한다면서 데리고 다니며 돼지고기 사먹이고 밤에 라면 끓여 먹이고…. 7~8㎏ 더 쪘다. 원래 호리호리 할 때는 예쁜데(웃음). 실제 성격도 다르다. 나는 그렇게 착한 스타일이 아니다. 원래 극중의 해곤은 마누라를 두고서 바람 피는 이였는데 `영화가 지저분해진다'는 감독의 판단에 따라 노총각으로 바뀌었다. 나는 원래 것이 더 좋았는데…”

김씨는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장군의 아들>(89)로 데뷔해 <깊은 슬픔>(97), <남자의 향기>(98) 등에 출연했지만 구실이 미미해 주목하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다가 98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된 <보고 싶은 얼굴>이 여러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올해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의 시나리오를 쓴 것을 계기로 고료가 가장 높은 A급 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여배우 오현경씨가 출연하는 <블루>의 시나리오를 최근 마쳤고, 인조반정을 다룬 사극 <청풍명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출연하라는 주문은 전혀 없고 시나리오 요청만 쇄도한다. 시나리오는 제작자나 감독과 싸울 일도 생기고 쓰기도 힘들고, 나는 연기가 좋다.” 김씨가 들려준 <파이란> 시나리오 작업과정은 이랬다. “전부터 친구였던 해성이(송해성 감독)가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들고 왔다. <러브 레터>처럼 본 적도 없는 이를 사랑하는 이야기가 감상적으로 보이지 않겠냐며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맞다, 이 영화의 주인공 강재처럼 3류 양아치가 그런 사랑을 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강재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의미를 주자. 그랬더니 민식이형(최민식)도 반겼다.”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한 걸 쳐도 김씨는 한참 늦깍이다. 80년 광주사태 때 시민군과 함께 “트럭 타고 다니다가”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서울로 와서 안양예고를 들어갔지만 “공부가 싫어서” 무작정 대학로로 나갔다. 연극을 하고 영화로 옮기고 했지만 풀리는 게 없어 3년동안 막노동도 했다. “일산 호수공원, 정동극장 등의 공사판에서 바닥인생을 배웠고, 그게 참 많이 도움이 된다.”

<라이방>이 개봉하고 나면 김씨는 배우로서도 새로 주목을 받을 것 같다. 여러모로 올해는 김씨에게 가장 행복한 한 해가 될 듯하다.

임범 기자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