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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와 영화가 만난다면…
2001-12-18

고전 문학을 영화로 만든다는 건 감독에게 일종의 자살행위일 수 있다. 이미 다 알려진 줄거리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지만, 한정된 시간의 영상으로 문자예술의 풍부함과 대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의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44)가 데뷔작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1983)을 선택한 건 지나친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죄와 벌>의 사건을 단순히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에서 20세기 말 핀란드 헬싱키로 옮겨오기만 한 게 아니라, 사회규범과 개인규범의 충돌이라는 주제를 현대적으로 매끄럽게 변주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페테르부르그 뒷거리가 무대인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인류를 `종족보존이 임무인 범재`와 `나폴레옹적인 강자`로 나눈다. 그는 자신이 `강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벌레`에 지나지 않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했음에도 뜻밖의 죄책감에 빠져든다. 그를 구원하는 건 창녀 소냐다.

감독은 이 `고전 중의 고전`에서 크게 두 가지 모티프를 변형시킨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병적인 상상`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데 반해, 헬싱키의 라스콜리니코프인 라이카이넨(마르쿠 토이카)은 분명한 살해 동기가 있다. 그가 살해한 졸부 혼카넨은 3년 전 그의 약혼녀를 뺑소니사고로 죽였음에도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때 법학도였던 라이카이넨은 본인이 직접 맡은 이 사건에서 패한 뒤 도축장에서 막일하는 `사회적 부적응자`다. 그는 살인을 저지른 뒤 온갖 증거를 흘리고 다니며 형사 페나넨(에스코 니카리)의 추적을 비웃는다. 그는 복수한 것인가, `벌레`를 죽인 것인가, 좌절한 법학도로서 수사관과 두뇌게임을 즐기는 것인가. 감독은 라이카이넨의 진정한 범행 동기를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돌려 놓고 있다.

`종교적 구원`이라는 고전적인 모티프에도 변형이 가해졌다. 헬싱키의 소냐인 에바(아이노 세포)는 종교적 동기 대신, 라이카이넨의 살해 동기를 알게되면서 그를 동정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감독은 이 고전을 현대사회의 범죄심리극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괴물처럼 빛나는 건 도스토예프스키인 듯하다.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백이 깊다는 것이야말로 고전의 첫 번째 조건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뒤 `부록`으로 카우리스마키의 단편 <로키 6>(8분)을 덤으로 볼 수 있다. 29일 개봉.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