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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웨이] 영화인들이 점집에 가는 까닭은
2001-12-31

제발 대박을 말해다오

1999년 4월. 당시 현경림 프로듀서는 죽을 맛이었다. 이유는 제작하기로 한 영화의 파이낸싱이 원활하지 않아서였다. 결국 그는 신통하다는 홍제동 점집을 찾았다. 하지만 용하다는 점쟁이는, “기다리라고, 곧 좋은 소식이 올 거라”고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현 프로듀서는 신기한 꿈을 꿨다. 얼마 전 찾았던 그 보살이 꿈에 등장, 자신을 큰 절간으로 이끈 뒤에 다섯개의 금불상을 내보여주더라는 것이다. 다음날 감독은 “우리 영화 관객이 50만명이라는 말인가”라며 킥킥댔다. 그는 “50만명이 아니라 500만명일 것”이라고 응수했지만, 기대를 담은 해몽 이상이 아님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1년 뒤… 영화는 개봉됐고, ‘전국관객 800만명 돌파’라는 충무로 승부사들의 상상선과 기대치를 모두 넘어선 결과를 냈다. “<친구>의 흥행은 하늘만이 알고 있었다”는 누군가의 농담은 역전된 상황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코멘트였다.

역술인들의 예지로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충무로 스토리는 많다. 좋은영화 김미희 대표는 창립작품으로 로맨틱코미디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작가가 바뀌었고, 결국 잘 나가는 방송작가를 불러왔으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매니저의 소개로 경남 진주에서 올라왔다는 출장전문 재야역술인을 소개받았다. 시각 장애인인 그는 담담하게 “지금이야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지만, 곧 누군가가 일거리를 들고 올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2달 뒤. 좋은영화는 완성된 시나리오 한편을 건네받았다. <주유소 습격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역술이 점찍어주는 건 작품만이 아니다. 감독과의 궁합을 본다는 제작자들도 적지 않다. 최근 회사를 차린 제작자 C씨의 경우도 그렇다. 부인이 대신 생시를 들이민 점집은 S감독이 한때 다녔던 곳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사람의 궁합을 봤지만, “기복이 있어서…”라는 유보적인 답변을 듣기도 했다. 충무로 통신에 따르면, 이 정도는 약과다. J제작사의 경우, 상호명을 받아쓰는 것은 물론이고, 첫 영화의 연출을 맡은 감독의 이름이 적절치 않아 바꾸기로 했다는 풍문까지 돌 정도다.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데뷔를 눈앞에 두고 있는 K씨는 점집에 자신이 미리 점찍어둔 제작사 네댓개의 상호명을 보여줬고, 그중 이름이 눈에 띈다는 한 제작사로 결국 자신의 거취를 정했다.

물론 예찬론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쿠앤필름의 구본한 대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랭크인 날짜는 기본이고, 주위 영화인들에게 “어디가 좋다”며 “꼭 한번 가보라”고 추천을 아끼지 않았다. 생전 점집이라곤 몰랐던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도 그의 적극적인 꼬드김에 넘어갔을 정도다. 자신으로 인해 한때 강남 영동시장에 있는 점집에 영화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새해부턴 마음을 바꿔먹었다. “신통하다고 하는 역술인들은 과거를 귀신처럼 맞힌다. 하지만 미래는 한치 앞도 못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순애보> 때만 해도 “바다 건너 키 작은 사람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온다”고 했지만, 정작 일본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되니 오히려 영화인들 중에서는 점집을 찾기 보다 홀로 계시(?)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시네마서비스의 지미향 이사가 대표적. 가끔 꿈을 통해 흥행 여부를 예감한다. 일면식도 없었던 신철 대표가 군중을 보고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몇년 전의 꿈이 그 시작이다. 당시엔 <엽기적인 그녀>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이 알려지기도 전의 일이었다. 지 이사는 얼마 전에도 모 영화의 흥행을 예감하는 꿈을 꿨고, 1만원에 내다 팔았다고 웃는다.

임오년, 새해가 동터온다. 충무로가 한국영화의 호조라는 상서로운 기운을 이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가 그 기세를 이어받을 수 있을지 궁금증은 더해간다. 그런 연유로 점집에 들러 미리 횡액을 피하고, 길운을 맞으려는 제작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 아니더라도 부족하면 메울 방법이 있을 것이며, 뚫리면 막을 방도도 있는 법이다. 영화란 감독이나 제작자, 혼자 만드는 게 아니지 않던가.

이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