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정치를 찍으면서 영화만 찍는다고?
2002-01-15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 제1장을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에 대한 감상으로 채운다. 스페인 화가인 벨라스케스는 궁전 시녀들의 초상을 그리면서 오른쪽 구석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넣어두었다. 이 재미있는 발상 때문에 이 그림엔 수많은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림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시선, 그 자화상을 그린 실제 화가의 시선, 그리고 화가의 시선과 초상화의 시선을 따라잡으려는 감상자의 시선 등.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의 <꿈속의 여인>(1998)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작품의 안과 바깥에 대한 다양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작품의 무대는 히틀러 치하 온갖 선전영화의 생산공장이던 독일 베를린의 우파(UFA) 스튜디오. 작품에선 영화를 찍는 장면이 줄거리 전개의 주요한 배경을 이루고, 배우들은 영화 속 배우 역을 맡아 `연기`를 연기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세트는 정교하게 복원해낸 우파 스튜디오의 세트다. 우파 스튜디오는 1917년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선전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독일 정부와 은행·대기업이 합작해 군소 영화사를 통폐합한 뒤 창립한 영화사다. 이 스튜디오는 이후 히틀러의 악명 높은 선전상 괴벨스의 지휘 아래 숱한 프로파간다 영화를 생산해냈다.영화는 정치와 예술의 외설스런 결합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우파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한 블랙 코미디다. 스페인 내전이 터진 지 2년의 시간이 흐른 1938년, 우파 스튜디오에 스페인의 블라스 폰티베로스 감독(안토니오 레지네스)이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들을 이끌고 도착하는 데서 영화는 시작한다. 히틀러는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독일-스페인 합작 영화를 독일어와 스페인어로 공동 제작하도록 했다. 영화의 제목은 `꿈속의 여인`. 이 프로파간다 영화에서 파시스트 체제를 찬양하는 정열적인 집시 여인을 연기할 배우인 마카레나 그라나다(페넬로페 크루즈)는 블라스 감독과 내연의 관계다. 마카레나는 프랑코 정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무정부주의자인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 `영화를 통한 파시스트 국제 연대`에 동참했다. 이 프로그램의 진두 지휘자인 요제프 괴벨스(요하네스 실베르슈나이더)는 마카레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 자신의 모든 권력을 다 동원해 그를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난 다만 영화만 찍을 뿐”이라는 블라스 감독은 마카레나를 보호하기엔 너무도 나약한 인간이다. 괴벨스는 물론 블라스로부터도 역겨움을 느껴가는 마카레나는 곧 수용소로 끌려갈 운명인 집시 청년에 마음이 끌린다.영화는 파시스트 체제에 동원당한 `예술가`들의 행태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인간 군상을 드러낸다. 스스로 파시스트임을 자부하던 이는 히틀러 정권의 폭력을 맛본 뒤 “파시스트가 파시스트를 몰라본다”고 울부짖고, 더없이 정치적인 선전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은 “정치는 내 소관이 아니다”라고 변명한다. 웃음은 씁쓸하지만, 감독은 인간에 대한 냉소 대신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스페인 고야상 작품상 등 7개 부문 수상. 25일 개봉.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