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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리포트]신과 함께 노래를
2002-04-29

타락한 신부들이 흥겹게 노래하는, 슈피란델리 감독의 <신과 함께 가라!>드디어 떴다, 노래하는 신부님! 1970년대 팝계에는 노래하는 수녀님 음반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화통한 우피 골드버그의 속시원한 노래가 가슴을 뚫는 할리우드영화에는 신나는 율동과 노래로 선교하는 수녀들이 등장했다. 물론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는 여전히 그레고리안 성가가 스테디셀러 중 하나지만, 신부님들이 흥겹게 노래하는 모습을 접할 수 있는 영화는 지금까지 전무했다. 바로 이 빈틈을 치고 나온 영화가 독일 감독 촐탄 슈피란델리의 데뷔작 <신과 함께 가라!>(Vaya Con Dios: 스페인어)다.1957년생인 슈피란델리 감독은 단편영화계에서 진작부터 보증수표 명성을 구가해왔다. 몇년 전 개봉된, 걸지고 순박한 <수탉은 죽었다>를 두고 비평가들은 작품과 관객의 인터액션에서만큼은 슈피란델리를 따를 감독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감동의 도가니에 빠진 관객이 주인공인 애송이 지휘자의 손길에 따라 극장이 떠나가라고 주제곡을 함께 부르는 진풍경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장편 데뷔작으로 노래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신과 함께 가라!>에서 관객은 이제 노래의 함성 대신 눈물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디이터 데벤터의 카메라는 신부 세명을 따라간다. 박식의 대명사인 중년의 벤노 신부, 무식하나 순박하고 촌티 물씬나는 타실로 신부, 그리고 막 신부수업을 받기 시작한 아르보가 그들로, 노래로 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칸토리아너’ 교단 소속이다. 천사를 연상시키는 막내 아르보의 미성은 칸토리아너의 보물이며, 칸토리아너 신부들은 노래를 통해서만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다른 교단으로부터 이단시되는 이들의 마지막 거점인 마르크 지방 코린 수도원이 스폰서의 갑작스런 재정지원 중단으로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다. 우리의 주인공 세명은 신앙의 동료를 찾아 이탈리아로 향한다. 따라서 작품의 기본틀은 로드무비.신부가 등장하는 영화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덕분에 빈번히 선을 보인다. 관객은 타락한 현대사회에서 도덕의 마지막 파수꾼을 자처하는 성직자들의 신성한 세계에, 또는 속세의 인간보다 더욱 타락에 물든 성직자들의 면모가 파헤쳐지는 데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나 기존 작품들이 이 두 측면 중 하나에만 치중하고 있다면, 슈피란델리는 둘을 하나로 버무려 우화적으로 요리해낸다. 한편에는 도그마와는 거리가 먼 엉뚱한 신부들이, 다른 한편에는 신도들이 제발로 신을 찾아갈까봐 전전긍긍하는 권력/재력지향적 신부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이다. 감독은 대비를 극대화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성을 모호하게 만드는데, 현실주의의 옷을 훨훨 벗어버리는 것은 그에게 전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너네들이 아무리 타락해도 신은 ‘미워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는 메시지에만 집착할 뿐. <신과 함께 가라!>에 등장하는 신부들의 모습이 현실성을 상실할수록 관객은 이 낯선 인물들에게 더 진한 호감을 갖게 된다.하지만 비현실적인 영화 속 상황을 통해 관객이 진정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여기서 슈피란델리 감독 연출기량에 흠을 잡자면, 꿈 깨고 난 뒤 현실에 대한 대책을 전혀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터랙티브한 감동의 홍수를 안겨줄 것인가? 아니면 로셀리니, 파졸리니나 브뉘엘 감독이 그랬듯이 타락한 속세의 현상에 대해 진지한 담론을 제시할 것인가? 인터랙티브의 귀재 슈피란델리 감독은 적어도 차기작에서만큼은 양자택일을 해야할 듯싶다.베를린=진화영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