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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영화광 김봉석, 스포츠 영화 보며 인생을 깨닫다 (1)
2002-05-31

세상사 희노애락이 그 혼돈의 그라운드에 있더라

킥오프의 순간이, 조바심과 갈증의 시간이 닥쳤다. 우리 안의 흥분한 구경꾼들은 어서 승리와 패배를 내놓으라고 북을 두들긴다. 분하지만 인정하자. 실제 범죄보다 허술한 추리영화는 드물고 뉴스보다 재미없는 정치영화도 흔치 않지만 스포츠 중계보다 지루한 스포츠영화는 꽤 있다. 하지만 영화는 실황 중계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종종 해낸다. 스크린이라는 경기장을 넓게 쓸 줄 아는 지략을 갖춘 감독이 지휘하는 스포츠영화는 인간의 육체가 자연과 부대끼다 균형을 이루는 찰나의 엑스터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절대고독이고 때로는 가차없는 정쟁(政爭)이고 때로는 기도인 스포츠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과업을 이룬다. 경기장으로 간 영화가 잡아낸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아주 게으른 스포츠 애호가 김봉석이 슬로모션으로 전한다. 편집자

그 남자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한 가지 문제는 있다. 그 남자는 게으르다. 누군가 말하기를, 바다에 가서 가장 좋은 일은 바다 속으로 잠수하는 것이고, 다음은 바다 위를 헤엄치는 것이고, 마지막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게으른 탓에, 그 남자는 보는 것만 좋아한다. 축구, 야구, 농구, 권투, 골프, 레슬링 가리지 않고 모든 스포츠를 본다. 그리고 스포츠에 관한 글들을 읽는다. 스포츠 신문에 실리는, 별것 아닌 정보들까지 다 본다. 몇년 전에 날리던 선수가 퇴물이 되어 은퇴했다는 기사를 보기도 하고, 한동안 슬럼프를 통과하며 잊혀진 선수가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한다. 히딩크가 월드컵 감독을 맡은 뒤 쏟아졌던 숱한 비난의 어록들을 되살펴보면 정말 재미있다. 한국 최고의 선수에서 일본의 후보 선수, 그리고 돌아와 기아타이거즈(해태가 아닌)의 대표선수가 된 이종범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이상훈의 이유있는 방황과 함께, 가슴이 싸하다. 김승현과 힉스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전희철과 김병철의 동양은 올해 우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남자는 다양한 기록과 사건들을 읽으면서, 한 경기에서 벌어지는 순간의 승부를 역사로, 영원으로 확장한다.

응축된 시간들-순간에서 영원으로

스포츠를 지배하는 것은 철저하게 기록과 수치이지만, 실제로 극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이끌어주는 것은 운명이다. 스포츠는 우연과 필연이 극적으로 결합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만나는 탄성의 순간이, 스포츠에서는 거의 날마다 이루어진다. 그 순간 공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면, 그 순간 실투하지만 않았다면, 바뀌는 것은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역사다. 스포츠는 예측가능한 영역이지만, 결코 예측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혼돈의 세계다. 그 남자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 안에는 인생이 있고, 세계가 있고, 우주의 법칙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그것도 가장 극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누구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스포츠의 세계는 매순간 낭떠러지와 천국을 오가는 희열과 좌절을 경험한다. 짜릿하게, 인생의 희로애락을 찰나에 만끽한다.

스포츠를 다룬 영화는 그 순간을 주목한다. <애니 기븐 선데이>에서 알 파치노가 외치는 ‘1인치’는 지독하게 식상한 단어지만, 묘하게도 그 순간만은 가슴을 울린다. <그들만의 계절>에서 권위주의적인 감독을 거부하고 경기에 나서는 소년들은, ‘미래는 잊어버리자.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라고 되뇐다. 스포츠는 인생의 한 부분이고, 세상의 아주 작은 영역이지만 가장 전형적이고, 예리하게 전체를 그려낸다. 영화에 담기는 것도, 스포츠의 그런 순간이다. 한순간에 영원을 경험할 수 있는, 그 순간의 기억만으로도 일생을 살아갈 영혼의 양식이 되는 어떤 순간.

스포츠영화가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미국에서, 스포츠의 역사는 막중하다. <하트 인 아틀란티스>나 <프리퀀시>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경기에서 벌어졌던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행복해한다. 함께 그 순간을 맞이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통한다. 친구가 된다. 미국인에게 스포츠란,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극적인 스포츠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최초의 한국시리즈를 OB에 안겨준 김유동의 3점 홈런이나 전무후무한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 같은 것들. 그 순간을 자신이 함께했고,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행복해한다. 스포츠의 역사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과거이며 무형의 유물이고 아찔한 추억이다. 필 앨든 로빈슨 감독의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1989)은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이오와의 농부 레이는, 자신의 옥수수밭에 야구장을 만들면 ‘그들이 온다’는 계시를 받는다. 주위의 질시와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는 자신의 믿음에 따라 야구장을 만든다. 야구장에 나타난 이들은 바로, 수십년 전 야구 사기도박 사건에 휘말려 추방되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선수들이었다. 도박사건으로 추방되었던 이들을, 로이는 ‘꿈의 구장’에서 복권시켜준다. 한때 더러운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그들 역시 위대한 미국의 역사였고, 지극히 소중한 사람들임을 <꿈의 구장>은 보여준다. <꿈의 구장>은 미국인의 스포츠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믿음이 만들어낸 감동적인 영화다. 미국인이 아니라면, 선뜻 이해하기 쉽지는 않지만.

미식축구-욕망의 터치 다운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야구, 미식축구, 농구, 아이스하키다. 축구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었고, 아직 4대 프로 스포츠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다. 4대 스포츠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는 미식축구와 야구가 누리고 있다. 미식축구는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라고도 불린다. 선수마다 철저한 분업이 이루어지고, 세세한 규칙에 따라 모든 진행이 이루어지는 미식축구는 미국의 서부개척(혹은 점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학교마다 하나씩 미식축구팀이 있고, 축구부 주장은 최고의 킹카로 꼽힌다. 청춘영화를 보면 늘 등장하는 것이 축구부 주장이다(주로 머리가 텅 비고 야비한 인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들만의 계절>(Varsity Blues, 1999)에는 미식축구에 지배당하는 마을이 등장한다. 최고의 권력자는 고등학교의 미식축구부 감독이고, 미식축구부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미식축구가 지배하는 마을은, 권위적이고 오로지 승리만을 원한다.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 감독은 선수들의 부상을 알면서도 눈앞의 승리만을 위해 경기에 내보낸다. 과하면 넘치는 법이다. 스포츠의 세계는 결코 공정하지 않다.

프로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올리버 스톤이 미식축구의 세계를 파헤친 <애니 기븐 선데이>(Any Given Sunday, 1999)에서 구단주와 선수들의 목표는 오로지 돈이다. 마이애미 샥스의 전설적인 쿼터백 캡 로니가 부상을 입자 후보였던 윌리 비맨이 스타로 떠오른다. 인화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영달만 추구하는 윌리와 팀을 비싼 값에 매각하려는 구단주의 딸 사이에서 코치 토니 드마토의 신념도 흔들린다. <애니 기븐 선데이>는 올리버 스톤 특유의 장광설과 교훈이 거슬리지만, 살과 살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미식축구의 현장을 생생하게 잡아낸 촬영과 편집만은 탁월하다. 미식축구를 아직 본 적이 없다면, <애니 기븐 선데이>가 첫 번째 선택이다. 만약 승자의 논리가 지나치게 부담스럽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리플레이스먼트>(The Replacements, 2000)를 보는 것도 좋다. 선수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워싱턴 센티널즈는 전설적인 코치 맥건티를 영입하고 대체선수들을 모집한다. 죄수, 스모선수, 보디가드, 경찰관 등 다양한 경력의 ‘패배자’들이 모여들고, 엉망진창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틀을 잡아간다. 돌아갈 곳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지만, 대체선수로 있는 동안의 승리만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패배자’의 정서를, 복고적인 감성으로 가볍게 그려낸 찡한 영화다.

▶ 게으른 영화광 김봉석, 스포츠 영화 보며 인생을 깨닫다 (1)

▶ 게으른 영화광 김봉석, 스포츠 영화 보며 인생을 깨닫다 (2)

▶ 인생은 스포츠처럼, 스포츠는 인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