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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아시아 문화 콘텐츠 산업의 미래를 만나다, 대만문화콘텐츠페스티벌(TCCF) 참관기
정재현 2023-11-30

“예로부터 대만은 동양 국가와 서양 국가의 교차점에 자리했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 속에 흐르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대만이 지닌 강점이다.” 2023년 대만문화콘텐츠페스티벌(Taiwan Creative Content Fest, TCCF)의 개막식 주빈으로 참석한 정원찬 대만 행정원 부원장의 개회사 일부다. 동서 문화의 교섭지 대만은 콘텐츠 강국으로의 비상을 준비 중이다. 올해 대만은 국가 차원의 문화 콘텐츠 산업에 투자한 기업에 투자금을 세액공제해주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문화 콘텐츠 산업 융성에 그 어떤 나라보다 열을 올리는 중이다.

TCCF는 문화 특구로 발돋움할 대만에 추력을 제공하는 계기로 기능하기 충분하다. 올해 개회 4년차를 맞는 TCCF가 11월7일부터 12일까지 타이베이의 쑹산 문화창의공원 일대에서 열렸다. TCCF는 대만 내 문화 업무를 전담하는 행정기관인 문화부 산하 대만콘텐츠진흥원(TAICCA)이 주최하는 대규모 콘텐츠 교류의 장이다. 올해 TCCF는 29개국에서 온 100여개의 제작사가 참여하며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대만 내 콘텐츠 창작자들과 제작사들은 물론, 세계 각국 문화산업 종사자들은 TCCF에 모여 원천 IP로서 스토리가 갖는 막강한 힘을 다양한 경로로 역설했다. 올해 TCCF 행사는 피칭, 마켓 그리고 이노베이션의 세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2023년 TCCF에서 화제를 모은 콘텐츠와 세계 각국 창작진이 입을 모아 극찬한 한국 콘텐츠의 현주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또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등의 각본과 <조이 라이드>의 연출을 통해 할리우드 아시안 웨이브의 최전선에서 약진 중인 아델 림 감독, BL 콘텐츠가 강세인 대만에서도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한국 BL 드라마 <시맨틱 에러>의 두 창작진과 나눈 대화도 전한다.

2023 TCCF의 중심은 한국

2023 TCCF 개막식. 대만 행정부 각료와 미디어 파트너인 각국 언론사 기자들, 피칭 심사위원과 바이어들이 가득 모여 개회사를 경청 중이다.

올해 TCCF에서 개최국 대만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국가는 단연 대한민국이다. 행사 내내 제작사들과 창작진은 너도나도 자신들의 콘텐츠가 나아갈 활로로 한국을 언급하며 한국 콘텐츠의 범용성과 특수성을 역설했다. 특히 피칭은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 콘텐츠가 얼마나 세계 각국의 스토리텔러들에게 소구력이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는 섹션이었다. 각 작품의 프레젠터들은 8분으로 제한된 프레젠테이션에서 투자자와 심사위원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국의 콘텐츠를 레퍼런스로 들었다. 호색한 남성에게 복수하는 여성들의 연대를 담은 작품은 <더 글로리>를, 언더커버 누아르를 표방하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쉬리> <아이리스> 그리고 <최악의 악>을 자사의 작품과 비근한 예시로 들었다. 판타지와 로맨스가 결합한 작품은 어김없이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를 레퍼런스라 언급했고, 행사 내내 <시맨틱 에러>는 BL 장르의 동의어로 동치됐다. 비록 수상까진 이어지지 못했지만 피칭 기간 내내 화제성을 독점한 작품도 한국의 백주영 작가가 기획한 <술래는 이삼영>이었다. 올해 TAICCA와 아시아 인재 교류를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는, 2023 괴담 캠퍼스의 괴담 기획개발 캠프 피칭에서 선발된 <술래는 이삼영>을 TCCF 시리즈 부문 피칭작으로 선정했다. 취업 준비생인 29살 여성 이삼영이 좀비에게 물려 감염된 이후에도 취업 준비에 분투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술래는 이삼영>은 다분히 한국적인 이야기면서 동시에 만국 공통의 정서를 건드리는 이야기다. 백주영 작가는 자신의 스토리가 지닌 보편성과 행사 내내 마주한 화제성에 관해 “<술래는 이삼영>은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여성이 좀비가 되어도 꿋꿋이 하루를 사는 이야기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재난을 겪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좀비 세계관에 공감해준 것 같다”고 밝혔다. 행사가 끝난 후에도 세계 각국 바이어들은 백주영 작가와 이야기할 수 있냐며 기자에게 말을 걸었다. 피칭뿐 아니라 마켓에서도 한국의 부스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국영상위원회, 서울영상위원회, 제주영상·문화산업진흥원이 로케이션 인센티브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연 부스엔 늘 미팅 약속으로 내빈이 즐비했고, 11월9일 열린 콘퍼런스인 <Filming in Korea - Case Study and Incentives>에도 많은 해외 관계자들이 참석해 한국 콘텐츠의 위상을 실감케 했다.

2023 TCCF 개막식. 대만 행정부 각료와 미디어 파트너인 각국 언론사 기자들, 피칭 심사위원과 바이어들이 가득 모여 개회사를 경청 중이다.

올해 TCCF의 가장 큰 행사는 CJ ENM 홍콩과 TAICCA의 양해각서(MOU) 체결식이었다. 11월7일 CJ ENM 홍콩과 TAICCA는 대만 3대 통신사 중 하나인 위엔촨FET, 대만의 지상파 방송국 <TVBS>와 함께 중국 표준어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펀드를 출범했다. 이날 체결식엔 정성훈 CJ ENM 홍콩 대표, 옴므 차이 TAICCA 회장, 게리 차이 FET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최고운영책임자, 시나 리우 TVBS 대표가 참석했다. 옴므 차이 회장은 축사를 통해 “CJ ENM과의 제휴는 대만 콘텐츠 시장에서 중대한 이슈다. 콘텐츠 산업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스토리텔링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번 양해각서 체결을 통해 대만의 콘텐츠도 전세계 시장으로 뻗어나갈 수 있기를, 보다 많은 한국의 TV드라마를 대만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란다”는 소감을 공식적으로 전했다. 옴므 차이 회장은 대만의 TAICCA와 한국의 CJ ENM간 MOU 체결의 의의를 “자금적 협력을 넘어서는 인재 제휴의 기회”라 정리했다. “CJ ENM과의 MOU 체결을 통해 한국의 콘텐츠 및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어떻게 세계 시장에 한류를 안착시켰는지 마케팅의 비결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으면 한다.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한국의 문화 산업 수준과 중화권 문화 산업의 자유 창작 기지 역할을 하는 대만의 영향력이 합쳐진다면 전세계 문화 콘텐츠 산업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옴므 차이)

LGBTQ+ 콘텐츠의 가능성

2023 TCCF 마켓.

LGBTQ+는 대만 콘텐츠 시장에서 더이상 새삼스런 단어가 아니다. 2019년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특별 법안을 통과시킨 대만은, 2023년 현재도 여전히 아시아 최초, 유일의 동성혼 합법국이다. 동성애에 대한 자국의 인식을 반영하듯 대만 내 LGBTQ+ 콘텐츠는 수요도 공급도 막강하다. 올해 피칭에 참여한 대부분의 스토리텔러들은 내러티브에 LGBTQ+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이 별스러운 선의가 아니라는 것을 프레젠테이션마다 확실히 해두었다. 마켓에서 인산인해를 이룬 곳은 포티코 미디어가 차린 부스였다. 포티코 미디어는 전세계 최초의 LGBTQ+ 전문 OTT 서비스 ‘가가울랄라’를 운영 중인 대만의 LGBTQ+ 콘텐츠 전문 제작, 배급사다. 대만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금종상 시상식에서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휩쓴 GL 드라마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의 제작사이기도 한 포티코 미디어는 현재 대만 최초의 리얼리티 퀴어 데이트 쇼인 <보이스 라이크 보이스>의 론칭을 준비 중이다.

자국 내 대중화된 LGBTQ+ 콘텐츠에 익숙해진 대만 시청자들은 자연히 해외의 퀴어 드라마에도 눈길을 돌렸다. 대만 시청자들이 기꺼이 ‘심봤다!’를 외친 드라마는 한국의 <시맨틱 에러>다. 작품의 인기에 힘입어 작품을 제작한 김수정 감독과 이하은 기획 PD는 TCCF에서 주최하는 마스터클래스의 연사로 초청돼 11월8일 1시간여의 강연을 펼쳤다. 이하은 PD와 김수정 감독이 준비한 강연의 주제는 ‘BL 프로덕션의 한국 내 대중화 전략’이다. “<시맨틱 에러>는 처음부터 대중성에 초점을 두었다. 한국에선 낯선 소재인 BL 콘텐츠를 어떻게 활용해 대중을 공략할지를 연구했다”고 운을 뗀 이하은 PD는 “한국의 BL 시장과 원천 IP의 팬덤을 분석하며 <시맨틱 에러>는 누구나 보고 나면 연애가 하고 싶어지는 ‘청춘 로맨틱 코미디’로 접근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며 시장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김수정 감독은 “대중은 잘 만든 작품을 원한다. 그래서 두 배우의 얼굴만 믿을 순 없었다. 사랑에 빠지는 당위성과 개연성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는 연출의 변을 밝히고 “한국의 BL 시장은 이제 시작이다.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기존의 성공 사례를 답습하는 것 또한 성공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지금 창작자들이 수행하는 노력들이 한국 BL 장르의 다양화와 대중성 제고에 기여할 것이다”라는 제언을 더했다.

체험하는 콘텐츠의 시대

<Colored>를 체험 중인 관람객들.

문화 콘텐츠 산업 내 기술 발전의 현주소를 체험할 수 있는 이노베이션 존은 언제나 TCCF에서 박빙의 사전 예약률과 높은 화제를 기록한다. 올해 이노베이션 존은 ‘경험’, ‘산업’, ‘이벤트’의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 각 구역에 마련된 전시물은 영화와 TV 산업, 온라인 게임과 팝 엔터테인먼트 등 콘텐츠가 중시되는 스토리텔링 업계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확장현실(XR) 기술의 진보 가능성을 타진했다. 행사 내내 매진을 이뤄 표를 구하기 어려웠던 전시는 단연 <Colored>였다. <Colored>는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관람객을 1950년대 미국 앨러배마주의 몽고메리 카운티로 데려갔다. 관람객은 그곳에서 로자 파크스(인종 분리 정책에 저항하며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의 도화선을 촉발한 운동가.-편집자)가 등장하기 6개월 전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 흑인 고교생 클로뎃 콜빈을 만나게 된다. 콜빈의 시선에 맞춰 분리 차별이 횡행하던 마을버스, 흑인에겐 폭행과 유린이 일상이었던 교도소와 법정을 오가는 35분간의 체험은 2020년대에도 1950년대와 다를 바 없이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벌어지는 인종차별 문제와 소수자 혐오 문제를 경각게 한다. <Colored>는 증강현실(AR)을 기반으로 한 이머시브 전시를 제작하는 노바야와 <타이거 스트라입스>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플래시 포워드 엔터테인먼트의 합작으로, 2023년 4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초연됐다.

<Colored> 포스터.

사진제공 TCC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