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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한 블럭버스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시사기(2)
2002-08-31

욕망의 끝없는 재림,그 아수라 속 구원은 어디 있는가

구도의 영화 <성소>-구원에 이르는 길

주가 시스템의 한가운데에 들어갔을 때, 벽에 이런 글이 걸려 있다.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불교경전 <금강경>이다.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김용옥 <금강경강해>)는 말이다. 성소와 똑같이 생긴 오락실 동전교환원의 이름 ‘이희미’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道)의 본질을 일컬어 한 말이다. 이(夷)-보아도 보이지 않고, 희(希)-들어도 들리지 않고, 미(微)-만지려고 해도 만져지지 않는 게 ‘道’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나비는 장자의 ‘호접몽’이다. 나비로 날아다니다가 깨어났는데, 인간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건지, 나비가 꿈에서 인간 장자가 된 건지 모르겠다더라는 이야기다.

먼저 ‘호접몽’의 나비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짐을 상징한다. <성소>에서 노랑나비는 가상현실, 게임의 세계로 이끄는 길잡이다. 그곳에서 성소의 힘든 삶과 죽음이 replay된다. 이건 보통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윤회의 사슬과 닮았다. 성소가 입력된 프로그램을 어기고 총을 드는 건 replay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다. 동시 주와 관객에겐 게임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흔히 ‘공’(空)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말해지는 <금강경>이 제시하는 구원은 거칠게 말하면(거칠게 말하는 게 위험하다는 걸 감수하고서) 이렇다. 모든 구분과 경계, 그걸 가능케 하는 모든 이름과 형상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자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자유로워진다는 건, 버린다는 것이다.

<성소>가 액션활극에 그친다면 마지막의 시스템 본부 안 전투에서 주와 성소가 시스템을 파괴해야 한다. 그러나 replay의,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자는 구도의 영화라면 시스템 파괴 여부에 상관없이 주와 성소는, 관객은, 앞에 말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 사랑과 행복에 대한 미망도. 막바지의 액션이 무거워진 건 이 구도의 무게감을 실고 가려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치열한 전투의 막바지에서 사랑했던 가주노를 떠올리는 성소의 눈에 노랑나비가 난다. 갑자기 펼쳐진 바다 위로 나비가 달아나고 성소는 바다로 뛰어들며 나비를 쏜다. 나비를 죽이려고 한다. <금강경>에는 ‘뗏목의 지혜’라는 비유가 나온다. 강을 건너 피안으로 갔다면 타고온 뗏목도 버려야 한다. 나비를 죽인다는 건 성소의 마음에서 가주노를 버리는 것과 동시에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를 넘어 여기까지 타고온 뗏목을 버린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그러면 마지막에 다다른 섬에서 주와 성소의 통장에 시스템으로부터 돈이 들어오고 있다는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시스템은, 윤회의 사슬은 깰 수가 없다, 모든 걸 버리고 지혜를 얻을 때 구원에 이르를 수 있다고.

장선우의 영화 <성소>-다시, 영화를 가지고 놀다

장선우 감독은 속세에서 욕망에 절절 매여 헤매는 인간들을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처럽게 그려왔다. 그게 애처러워서 동시대성이 살아나고, 동시대성이 살아나서 더 애처로웠다. 그러다 문득 92년에 속세에서 벗어나는, 구도를 말하는 <화엄경>을 내놓았다. 그 어법이 직설적이었던 <화엄경>은 10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흥행에서 손해본 영화이기도 했다.

마치 주기가 있다는 듯, 8년이 지나 그는 <성소>에서 <금강경>의 말씀을 전한다. 그 어법은 사뭇 달라졌다. 다양한 층위의 구조 속에,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들을 섞어 재배치한다. 허술한 곳도 있지만, 큰 줄기의 짜임새가 정교해서 이걸 액션활극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물론 몇몇 의문부호가 남겠지만, 그것도 재미의 한 부분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성소>도 허술하게 열려 있다. 장 감독은 “영화를 가지고 논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영화를 우습게 본다는 게 아니라, 영화를 놀이삼아 논다는 뜻이다. 다층위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성소>는 전반부의 유쾌한 액션처럼, 어딘가 틈이 벌어진 모습이 자유롭다.

그럼 그가 전하려는 구도의 메시지가 잘 녹아들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가. 이 대답은 ‘친절 버전’을 보기 전까지 유보해야 할 것 같다. 그전에 눈에 띄는 건 <성소>의 감독이 구도의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면서도, 막상 구도 자체를 그만큼 절실히 원하지는 않는 것처럼 다가온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이르른 낙원 같은 섬이 뜻밖에 썰렁해 보인다.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이랬다. 세속적 승부에서 일찍 졌거나 냉소해버려 놓고, 여자 앞에서 쩔쩔맨다. 스스로 공격성을 버리되, 체제나 시스템은 죽어라고 싫은 자유주의자 장선우와 닮았다. 게으름의 자유까지 요구하는 듯한 이 래디컬리스트의 기질이, <성소>에서도 완전히 숨어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아직 민주-반민주의 전선이 남아 있던 90년대 초반에 세인과 구도자 모두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 <화엄경>과, 지금 풍요와 이미지의 시대에 ‘諸相非相’을 말하는 <금강경>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 그건 ‘도’나 ‘구원’보다 속세의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그의 시선이다. 영화에서 강타, 가주노가 부르는 노래말은 이렇다. “얼마나 아파야 하나, 얼마나 다쳐야 하나. 구하지 마라, 그럼 행복할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는 대체 뭐야.”

욕망을 부정하기도, 잊기도 싫은 사람들의 구원은 어떤 걸까. 장 감독은 모든 욕망, 세속적 재미 다 가지고서 여기 속세에서 저기 피안의 땅으로 힘든 강을 건너가 보려고 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건너가 보자고 한다. 나비를 따라서, 나비를 죽이고. 임범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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