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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한 블럭버스터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시사기(1)
2002-08-31

욕망의 끝없는 재림,그 아수라 속 구원은 어디 있는가

감독 몰래 하는 시사회가 있었다. 연기, 촬영, 편집 모두 감독이 책임지고 자기 이름으로 나가는 게 영화인데, 그걸 감독 몰래 기자들에게 보여주다니! 이 희한한 사태의 속사정은 이랬다. 처음 프린트를 뽑았더니 장선우 감독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다. 당연히 장 감독은 다시 편집해 최종 프린트를 보여주려 했다. 그런데 최종 프린트는 개봉일 9월13일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서야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영화 월간지나 주간지는 이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을 개봉 전에 다루기가 힘들다. 급기야 제작사는 장 감독 모르게, 부분 수정이 있을 거라는 설명을 앞에 달고서, 지난 8월12일 영화 전문지 기자들을 불러 시사회를 가졌다. 그때, 뭔가 죄짓는 것 같은 기분을 달고서 <성소>를 봤다.

8월20일께 최종 편집을 마친 장 감독은 그 사실을 알고서 이랬다. “당신이 본 건 불친절 버전, 망하는 버전이야. 새로 나올 프린트는 친절 버전, 뜨는 버전이라구.” 7분가량을 덜어내 새로 넣고, 믹싱을 새로 하고, 일부 CG를 손봐서 영화의 느낌이 확 다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시사기는 양념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맛본 것이어서 전체의 풍미를 논하기가 힘들다. 재료의 선도와 조리의 강도, 씹히는 촉감 정도를 전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사상최대의 제작비 110억원, 장선우 감독의 SF액션 시도, 20살의 아이콘 임은경의 첫 영화…. <성소>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한두개가 아니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봐도, 장 감독의 말을 들어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던 게 <성소>다. 첫 프린트, 이른바 ‘불친절 버전’을 봤을 때 <성소>는 고밀도 zip파일이었다. 액션활극의 플롯이 있고, 그 밑에 현실과 가상현실이 뒤얽히는 장치가 있고, 그 밑에 구도의 메시지와 구도의 길로 가는 인간들의 애환이 숨겨져 있는 다층위적 구조다(이건 ‘친절 버전’에서도 안 바뀔 것 같다). 재미? 있다. 어떤 재미? 층위를 달리하면서 재미의 방향이 바뀐다. 흥행? 예상을 잘 못하겠다. 장 감독 왈. “걱정 마! ‘뜨는 버전’이라니까.”

액션활극 <성소>-소녀를 죽게 내버려두라?

청년 주(김현성)는 자장면집 배달부다. 그러나 꿈은 프로게이머이다. 만날 오락실에서 산다. 오락실 동전교환원 이희미(임은경)를 좋아하지만 희미는 주에게 냉랭하다. 어느 날 밤길에 노랑나비가 날아가더니, 희미를 똑 닮은 ‘성냥팔이 소녀’가 지나간다. 이 소녀는 성냥 대신 라이터를 판다. 1천원주고 라이터를 하나 샀다. 그날밤 라이터에 적힌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찍었더니,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게임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온다.

게임의 규칙. 1)성냥팔이 소녀(이하 성소)를 원래 동화처럼 얼어죽게 만들되, 그전에 그녀의 사랑을 얻어라. 그래서 그녀가 죽을 때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고 웃으면 당신은 win이다. 2)그전에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이끌려 여관방에 가거나, 다른 게이머가 그녀의 사랑을 얻으면 game over. 3)그녀와 다른 게이머의 접촉을 차단하려는 시스템 보위대원들과 또는 다른 게이머와 싸우다 죽으면 역시 game over.

이 게임 이상하다. 성소의 사랑을 얻으라고 해놓고, 그녀가 죽도록 하라니. 그러니까 게임의 목적은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지속적인 replay이다. 게이머의 목표는 죽기 전 성소의 환영 속에 등장할 인물의 자리를 놓고 싸워 이겨서 배당금을 받는 것이다. 사랑보다 배당금을 노리는 바운티킬러들의 각축장이 게임의 공간이다. 이 냉혈한 세계에, 휴머니스트의 기질을 버릴 수 없는 이가 등장한다면? 그는 성소가 죽도록 내버려 둘지를 두고 갈등할 것이다. 그리고는 깨달을 것이다. 진정 싸워야 할 악당은 바운티킬러(다른 게이머)들이 아니라, 성소를 계속 얼어죽게 하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게임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가 시스템을 향해 총을 들면 아! <영웅본색>의 주윤발이고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런데 주는 좀 어리버리하다. 갑자기 영웅적 전투력을 얻는 건 뜬금없다. 주와 한편이 되는 레즈비언 게이머 라라(진싱)가 주 대신 화려한 액션을 펼친다.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뛰어올라 하늘을 날며 쌍권총을 쏘고, 나이트클럽에서 무용가 진싱답게 파워 넘치는 춤을 액션과 섞어 선보인다. 하지만 그녀도 가끔씩 실수를 해서 엉뚱한 벽에 부딪혀 자빠진다. 화려하면서도 코믹하고 어딘가 빈 것 같은 이 액션이 신선하다.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얼어죽기 직전의 성소를 따뜻한 곳에 데려가 재운다. 이제는 시스템과의 전투다. 깨어난 성소도 시스템에 저항하며 총을 쏘다가 체포된다. 교정 프로그램을 강요받는 성소를 구출하기 위해, 주는 시스템의 본부로 들어간다. 거기서부터 액션이 무겁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건물과 차량이 폭파되는 물량도 한국영화 중 두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많다. 그러나 앞의 경쾌하고 헐렁한 맛은 찾기 힘들다. 할리우드영화처럼 액션의 가속도 법칙을 따르는 걸로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이상하다. 마지막에 시스템을 폭파시키고 주와 성소, 둘이 살아남아 낙원 같은 섬(타이의 푸켓섬에서 촬영)에서 엔딩을 맞는다. 이게 어디지? 게임의 시스템이 파괴됐으면 현실로 와야 하지 않을까. 주의 독백이 나온다. 시스템으로부터 우리의 계좌에 돈이 들어오고 있다고. 그럼 시스템은 파괴되지 않은 건가.

버추얼 리얼리티 <성소>-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다

<매트릭스>는 현실과 가상현실이, 의식과 육체가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다. 의식 속에서는 지금 시대와 똑같은 공간에서 살지만, 실제 사람들의 몸은 지금보다 미래의 시대에 컴퓨터가 만든 유리관 안에 태아처럼 갇혀 있다. 오시이 마모루가 감독한 <아바론>은 그보다 동양적이어서, 이분법이 희석된다. 현실과 가상현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들어가면서 착종된다. 실제 몸이 어디에 있는 건지 미궁에 빠진다.

얼핏 <성소>는 <매트릭스>에 가까워 보인다. 주가 전화를 걸어 게임에 접속할 때 사각형의 게임 툴바가 화면에 뜬다. 이 툴바가 여기부터 게임이라고 구분지워주는 역할을 한다. 또 중간에 주의 친구 이(김진표)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이고, 곧 이어 이가 주와 성소의 공간에 등장한다. 주의 시점에서 게임에 접속하거나, 재접속할 때는 로딩화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컴퓨터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화면에서 재현하고 있다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게이머들의 몸은 당연히 현실의 컴퓨터 앞에 있을 것이다. 툴바와 로딩화면만으로 현실→가상현실의 공간이동을 설득해내는 것도 참신하다. 군말없이, 빨리 공간을 이동함으로 해서 영화에 긴박감이 배가된다.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 건, 얼어죽었어야 할 성소가 주의 계호로 살아난 뒤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성소는 주나 이, 라라처럼 게임에 접속해 들어온 게이머가 아니다. 사람 아닌 게임 속의 프로그램일 따름이다. 영화 속의 시스템 유지자들은 성소에게서 버그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버그로 보기엔 너무 인간적이다. 사람들에게 냉대받고, 추운 밤길을 헤매다, 배고파 라이터 가스를 마시며 얼어죽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해온 성소가 분노해 선인, 악인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쏜다. 총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다 죽고, 아론 네빌이 애절한 솔풍으로 부른 <아베 마리아>가 흐른다. 그 사연의 절절함이 보는 이의 슬픔으로 전이되면서, 이 프로그램은 인간으로 살아난다. 당연히 모순인데, 순간 슬픔이 버그가 돼 게임과 현실에 대한 분별력이 약해진다.

이제 성소는 자기와 사랑에 빠졌다가 시스템에 의해 살해된 가수 가준오(강타)를 잊지 못하며 자살까지 시도한다. <성소>는 그런 식으로 경계를 허물면서, 엔딩의 현실도 게임도 아닌 듯한 섬에 이른다. 그럼 이건 <아바론>인가? 아니다. <매트릭스> <아바론>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가 이따금씩 고개를 내민다. 그 열쇠는 게임공간으로 들어갈 때마다 화면에 나타나는 노랑나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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