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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각본,주연 겸한 졸업작품 <쉬브스키> 찍은 김인권의 영화 만들기(1)
2002-08-31

젊음의 패기로 슛!청춘의 혈기로 OK!

<조폭 마누라>의 새끼건달 ‘빤쓰’ 김인권이 영화를 찍는다. 수십억원 들고 찍는 상업영화는 아니어도, “절대 흉내내지 말 것”이라는 오만한 모토 아래 밤샘을 거듭하며 촬영을 마친 디지털 장편영화 <쉬브스키>. 군대도 갖다오지 않았는데 아직 졸업을 못한 동국대 연극영화과 96학번 김인권이 감독과 각본, 주연을 겸한 졸업영화다. 1년이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백명은 찍고 있을 졸업영화가 뭐 그리 특별할 것 있을까, 라고 지레짐작하면 서운하다. 웬만한 프로 못지 않게 빡빡한 스케줄을 버틴 아이들, 돈도 없고 기술도 없어 몸을 던져 ‘리얼한 액션’을 구사하는 이들. 유치하다고 욕먹어도 견딜 수 있을 이들의 패기가 <쉬브스키>의 무더운 뒷골목을 질주한다.편집자

일원동, 벌건 대낮, 물고 뜯고 때리는 두 양아치. 양식있는 주민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신고를 받은 일원동 파출소 경찰들이 벼락같이 출동했지만, 조금은 무안하고 조금은 귀여운 심정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허, 참, 연기를 어찌나 리얼하게 하는지.” 서로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진 190cm 거구의 폭력배와 170cm 약간 넘는 가냘픈 백수 청년은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작품 <쉬브스키>를 찍고 있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그제야 촌티 풀풀 나는 <조폭 마누라>의 건달 ‘빤쓰’ 김인권을 알아보고선 공터 가장자리에 종종이 모여 처음 보는 영화촬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손가락질 몇번과 웅성대는 소음이 고스란히 카메라 안에 담기는 줄도 모르는 채. 김인권이 감독과 각본, 주연, 기타 몇 가지 역할을 맡은 디지털 장편영화 <쉬브스키>는 이렇게 사고와 NG, 펑크까지 넉살좋게 휘어잡는 카메라 세대를 둘러메고 뛰어왔다. 비가 오면 비닐을 뒤집어쓰고, 해가 나면 온몸이 익어가면서, 두달 넘도록 한번도 호흡을 늦추지 않았다.

노란 우비와 분홍색 고무장갑의 외계인

어찌보면 <쉬브스키>는 그렇게 때깔나는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요람은 KFC 치킨도 너무 비싼 것 같았던 김인권의 십대 시절, 도구는 여기저기서 빌린 PD-150 카메라 세대, 후반작업까지 예상되는 총제작비는 1천만원 남짓이다. <쉬브스키>가 얼마나 아껴 찍는 영화인지는 동국대에서 진행되는 세트 촬영현장만 살짝 들러봐도 알 수 있다. 사방을 판자로 두르고 화려한 천을 덮어 씌운 외계인 ‘지블리언’ 가정의 안방. 어딘지 ‘아트’의 분위기를 내뿜는 사진 한장과 글 몇줄이 어울리지 않는 스튜디오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했더니, 조심스럽게 해체한 안방 벽이 교수님 몰래 훔쳐쓰는 “120만원짜리 벽지바른 고급 세트”였다. 소품과 의상 또한 냉정한 사람이라면 웃고 넘어갈 수준이다. 비닐로 만든 1회용 노란 우비와 분홍색 고무장갑이 외계인 복장이라고 우기는 이 청년들은 담대한 것일까, 뻔뻔한 것일까. 그러나 김인권이 설명하는 <쉬브스키>의 원색적인 배경은 가난한 현실을 정면으로 뚫어보려는 패기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엔 특수분장을 해봤는데, 영 아니더라구요. 할리우드영화처럼 못 찍을 거라면 아예 흉내도 내지 말자고 결정한 거죠. 한없이 유치하게 가보자고.” 이렇게 방향선회. <황비홍>과 <스타워즈>를 꿈꿨던 <쉬브스키>는 에드 우드의 어설픈 SF와 막싸움을 혼합한 영화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추락’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남들이 보는 추락에 불과하다고, 4천원짜리 티셔츠를 단체로 입은 <쉬브스키> 제작진은 믿고 있다.

김인권이 처음으로 이런 교훈,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곳은 첫 촬영장소였던 합기도장이었다. 김인권이 연기한 주인공 태주와 그 숙적인 희택이 결투를 벌이는 장면. 영구아트무비에서 일하는 스탭의 지도하에 열여섯 시간을 뒤엉켜 있었는데도 좀처럼 기대했던 합이 나오질 않았다. 카메라에 찍힌 모습은 더욱 끔찍했다. 화면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숨김없이 드러내는 디지털카메라는 손과 손이 부딪치지 못하고 여백이 생기는 약점까지 고스란히 잡아냈던 것이다. 결국 김인권은 액션장면 연출을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제대로 무술을 배워본 적이 없는 양아치가 어떻게 1m 높이로 몸을 날리며 상대를 가격할 수 있을 것인가. 김인권은 항상 짱이 되고 싶었던 그 자신이 중·고등학교 때 싸웠던 것처럼 상황 되는 대로 마구잡이 액션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나니 대사도 몸짓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대부분의 스탭들은 동네 골목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을 잊지 않았고, 시나리오를 외우는 대신 마음껏 자신의 경험을 대입하기 시작했다. 김인권이 <쉬브스키>의 기둥을 잡았던 바로 그 순간처럼.

<쉬브스키>, KFC가 낳은 영화

김인권은 “하늘이 내린 음식”이라 찬양하면서도 어렸을 땐 돈이 없어 자주 못 먹었던 KFC 치킨을 먹다가 <쉬브스키>를 떠올렸다. “장원아, 우리 조폭 보스하고 맞장뜨는 영화 함 만들어볼까?” 김인권과 그의 고등학교 친구 장원은 ‘정글’ 같은 학교를 함께 헤쳐나온 사이. 김인권이 호시탐탐 1, 2위 자리를 넘보며 공격적인 수컷으로서의 발톱을 세우는 캐릭터였다면, 장원은 그 주위를 맴돌 뿐 함부로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방관자에 가까웠다. 여기에 또 한명의 기억. “제가 중학교 1학년 때던가, 주먹으로 싸워서 판정승 비슷하게 이긴 애가 있었는데 걔가 나중에 학교 짱이 됐어요. 에이, 그때는 못 덤볐죠. 걔는 계속 싸우면서 단련했으니까.” 이렇게 해서 별볼일 없지만 여자친구만은 남부럽지 않게 예쁜 아이를 확보한 태주와 태주에게 꼭 쥐어 사는, 나름대로 부유한 친구 장원, 태주가 이기고 싶어 안달하는 조폭 희택의 캐릭터가 탄생했다.

<쉬브스키>는 희택 역의 이한솔씨 설명대로라면 “대한민국 남자들이 누구나 한번은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지방에서 상경해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태주는 배우가 꿈이지만 오디션을 볼 때마다 부족한 이해력과 서툰 연기 때문에 번번이 창피를 당한다. 예쁘장한 여자친구 지선은 태주의 위안이자 걱정거리. 태주는 동네에서 가장 센 조폭 희택이 지선을 만난다는 소문을 듣고 광분하다 어린 시절 친구 장원과 지선의 사이마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삽화 한 가지가 더 끼어든다. 노란 피부를 가진 이상한 족속들이 씹**라는 욕을 입에 달고사는 태주 패거리를 ‘쉬브스키’라 부르며 따라다니는 것. 이들 외계인 ‘지블리언’은 마치 동물이 나오는 퀴즈 프로그램을 풀 듯 전파로 전달된 태주의 행동을 방송사에서 지켜보며 수다를 떤다.

♣ <쉬브스키>팀은 장마 때문에 갑자기 세트촬영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이것저것 맞춰볼 게 많다. 더운 날씨에 비닐을 뒤집어쓴 꼬마가 짜증을 낸다. "너 자꾸 그러면 누나만 이쁘게 나간다"고 위협해도 속수무책. 결국 칭얼거리는 아이를 데리고 촬영을 마쳤다.

첫 번째 원칙은 재미, 두 번째 원칙은 현실성

김인권은 졸업 작품으로는 벅찬 분량인 두 시간가량의 이 이야기에 덤벼들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쉬브스키>는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하고, 김인권 자신의 이야기인 만큼 철저하게 현실에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캐스팅도 최대한 극중 인물의 성격과 비슷하게, 가능하다면 모델이 된 인물 자체를 배우로 쓰고 싶었다. 여기서 나타난 첫 번째 장애물. 장원 역을 맡기려 했던 친구 장원이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며 동남아시아 어딘가로 떠났다. 장원처럼 부산 사투리를 쓰고 몸집이 약간 두꺼우며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 20대 청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학교 기자재실에서 장비 대여 아르바이트를 하던, 거의 장원으로 착각할 법한 후배를 만난 것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게다가 그는 ‘장비대여담당’. 스탭으로도 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위압적인 외모와 어느 정도의 운동 실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아마추어 배우 중에선 찾기 힘들었을 희택은 모델 출신 이한솔씨가 스탭 모집공고를 보고선 “혹시 배우도…”라며 제 발로 찾아왔다. 여기에 <오세암>의 눈먼 꼬마 여자아이 서예진이 발랄하고 남자를 편하게 대하는 동국대 영화과 학생으로 장성해 합류했고, 자그마한 조역들도 신기하게 각기 주인을 만나 자리잡았다.

인물 배치가 끝났다면 남은 건 실전이다. 서른 넘은 나이에 늦깎이 영문과 학생으로 입학해 영화과까지 한눈팔고 있는 프로듀서 김영아씨를 비롯, 동국대 학생들과 김인권의 친구들이 모여 촬영을 시작했고, 조금씩 모은 제작비에 김인권이 남들보다 많은 돈을 보태 500만원을 만들었다. 이틀 밤새고 하루 쉬기. 훈련을 하는 것처럼 정확하고 엄격하게 촬영 일정을 짰다. 제작부는 날마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전화를 하며 연기자들의 스케줄을 체크했고, 만에 하나 펑크날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오디션 자료를 뒤져 대역을 물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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