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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투 퍼디션>과 샘 멘데스(1)
2002-09-06

이방인의 눈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해부하다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샘 멘데스는 표정 관리에 애를 먹고 있었다.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가 감독상과 작품상을 비롯한 노른자위 부문 5개를 휩쓸면서, ‘뷰티-풀’ 나이트로 기록된 이날 밤, 샘 멘데스는 감독상 트로피를 들고 무대를 내려와 기자회견장으로 향하는 길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하지? 지금 내가 영화계에서 은퇴하면 전설적인 인물로 남겠군.”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알아내는 데는 그로부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편의 영화로 남을 전설을 택할 것인지, 소포모어 징크스에 덜컥 발목 잡힐지, 전작을 넘어서 일취월장의 만듦새를 선보일 것인지, 두 번째 영화가 전모를 드러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체리 과수원> <캬바레> 연출한 연극계의 미다스

샘 멘데스가 두 번째로 골라잡은 <로드 투 퍼디션>은 여러모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의외의 카드였다. 그 사이 멘데스는 “영화화된다면 꼭 보고 싶겠지만,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며 <뷰티풀 마인드>와 <쉬핑 뉴스>의 연출을 고사한 터였다. 그러던 그가 1930년대 미국의 공황기를 배경으로 아일랜드계 갱단의 일과 가정, 그 딜레마를 그린 <로드 투 퍼디션>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위기를 그린 블랙코미디 <아메리칸 뷰티>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장르영화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장르영화도 잘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멘데스는 이것이 단순한 갱스터영화,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장르영화처럼 보이지만 플롯과 테마는 그렇지 않다. 당신과 당신의 운명에 눌려 있는 어린 세대를 구하기 위해 어디까지 손을 쓸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그러고보면 <로드 투 퍼디션>은 <아메리칸 뷰티>와 다르고도 같은 영화다. 두 영화는 모두 산산이 무너져내리는 가족의 이야기, 도덕적으로 불안정한 이들의 방황과 속죄의 기록이다. <로드 투 퍼디션>은 <대부>의 신화적 풍경을 배경에 두르고 있지만, 갱스터의 서사를 펼치기보다는 ‘부성애’와 ‘숙명’을 이야기한다. 아버지들은 가족을 배반하고 위험에 빠뜨리며, 아들들은 그 아버지들의 ‘업보’가 된다. 마피아 보스 존 루니의 양아들이자 충성스런 심복인 마이클 설리반은 조직원 살해에 연루된 광경을 어린 아들에게 들키고 만다. 못 볼 것을 본 죄로 어린 아들이 위험에 처하자, 마이클은 자신을 키운 조직을 향해 복수를 감행한다. 성당에서 만난 루니와 설리반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택한 삶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결코 천국에 못 간다는 사실이지.” “내 아들은 갈 수 있어요.” 살인을 일삼는 부도덕한 자가 아버지의 책임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아들을 지키는 것으로 지난 악행을 속죄받고 구원받을 수 있을까. 딸의 친구에게 욕정을 느끼면서 생의 의욕을 찾아가는 <아메리칸 뷰티>의 중년 남자에게 동조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었던, 그 엉거주춤한 기분. “절대적인 도덕이란 건 없다”고 믿는 샘 멘데스는 자신이 그 주제에 매혹돼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가족의 붕괴나 갱스터의 연대기나 이미 하나의 ‘아이콘’이 돼버린 만큼 진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지만, 샘 멘데스가 만들면 다르다는 믿음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어서인지, <로드 투 퍼디션>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고급 앙상블로 진용을 짰다. 톰 행크스가, 폴 뉴먼이, 주드 로가, 스탠리 투치가, 그리고 베테랑 촬영감독 콘래드 홀을 위시한 일급 스탭들이 모여들었다. 전작보다 제작비는 5배 넘게, 연출 개런티는 10배 가까이 뛰었다. 평론가 케네스 튜란은 “스튜디오의 든든한 예산으로 심각한 주제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흔치 않다”면서, <로드 투 퍼디션>을 “원하는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영화”라고 소개했다. 그 ‘능력’의 ‘진원지’가 샘 멘데스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어떻게, 할리우드 진입 4년차 감독이 그런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일까.

샘 멘데스는 할리우드에서 <아메리칸 뷰티>라는 걸출한 데뷔작을 내놓기 전부터 ‘미다스 멘데스’로 불린 영국 연극계의 스타 감독이었다. 케임브리지 재학 당시에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인력 경영을 잘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경영학에도 관심을 두는 등 주도면밀하게 감독 수련을 해온 그는 극단을 만들어 여러 작품을 무대에 올렸고,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졸업과 동시에 치체스터 페스티벌 극장에 들어가 대타로 연출을 맡으면서 기회를 잡았고, 대배우 주디 덴치를 섭외해 <체리 과수원>을 성황리에 상연했다. 주디 덴치는 스물셋의 청년 멘데스를 “총명한 아이”(brilliant boy)라고 칭찬했고, 멘데스의 작품에 두번 더 출연을 자청하기도 했다. 이후 로열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랠프 파인즈와 함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를 상연하는 등 한동안 셰익스피어극에 심취하기도 했고, 현재까지 적을 두고 있는 돈마 창고극장에서 <유리 동물원> <컴퍼니> <캬바레> <푸른 방> 등을 연출했다.

<캬바레>는 멘데스에게 스필버그와의 인연을 만들어준 작품. 앨런 볼의 시나리오 <아메리칸 뷰티>를 사들인 드림웍스는 스필버그에게 메가폰을 쥐어주려 했지만, 스필버그는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고사한 뒤에, 뮤지컬 <캬바레>를 보고나서 멘데스를 적임자로 추천했다. 그로부터 약 18개월 뒤, 멘데스가 오스카 시상식 연단에 올랐으니, 스필버그에게 사례는 톡톡히 한 셈이다. “내게 시나리오를 건네주고, 이 트로피를 건네준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감사한다. 당신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다.” 감사와 축하의 귀엣말을 전하며 다정하게 포옹하는 이들의 모습이, 피는 나누지 않았으되 부자의 정을 나눈 루니-설리반(폴 뉴먼-톰 행크스)에 투영됐으리라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샘 멘데스의 연극 리뷰 - <푸른 방>을 중심으로 연극계의 비아그라

한때 니콜 키드먼이 무대에 선다고, 그것도 누드 연기를 선보인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연극 <푸른 방>은 샘 멘데스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아메리칸 뷰티>의 촬영이 시작되기 몇달 전인 98년 가을 무렵 한달 남짓 상연됐다. <푸른 방>은 <아이즈 와이드 샷>으로 잘 알려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또 다른 소설 <원무>(La Ronde)를 각색한 연극. 1921년 초연됐던 이 작품은 50년 막스 오퓔스가 영화로 옮겼을 뿐 정작 무대에선 그리 자주 상연되진 않았다. 쾌락을 좇아 끊임없는 일탈을 시도하는 남녀의 애정 행각, 그 섹시하고 냉소적인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풀어가기에 부담이 따랐던 것이다.

샘 멘데스는 <푸른 방> 상연 당시 ‘연극계의 비아그라’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섹시한 연극으로 연출해냈다. 오스트리아에서 런던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말로, 스토리의 배경을 바꾸고, 자유롭고 발랄하게 각색한 것은 작가 데이비드 헤어의 공이라 해도, 10개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5쌍의 남녀 캐릭터를 2명의 배우, 니콜 키드먼과 이언 글랜이 모두 소화하게 한 구성의 기발함은 샘 멘데스의 것이었다. A가 B와 섹스하고, B는 다시 C와 섹스하고… 마침내 A로 마무리되는 원형의 먹이사슬을 연상시키는 짝짓기 에피소드는, 섹스와 배신에 관한 진지한 원작과 달리, 시니컬하고 정교하며 위트 넘치는 코미디로 연출됐다. <런던 이브닝 포스트>는 푸른 조명, 네온사인, 영화의 자막, 오르가슴의 시그널로 반복되는 전자음 등 포스트모던한 화려함으로 치장한 ‘슈퍼 쿨 앤 힙’ 프로덕션을 주목했고, <가디언>은 각색은 아쉽지만 연출만큼은 ‘실크처럼 부드러웠다’고 칭찬했다.

스필버그가 샘 멘데스를 발견한 계기가 된 <캬바레>는 런던은 물론 브로드웨이에서도 상연하고, 토니상 베스트 리바이벌 뮤지컬상을 타는 등 대중과 평단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던 작품. 샘 멘데스는 실제 나이트클럽을 개조해 어둡고 섹시하고 조야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의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감행했다. 연극계에서 그는 “관객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 창작극이 아닌 희곡을 독창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요리해내는 솜씨”를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