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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_ 게임 메뉴얼 1.0 (8)
2002-09-07

가상현실부터 , <성소>사전

바이러스이 영화에서 주는 아이디카드를 잃기 전부터 시스템에 의해 바이러스로 간주된다. 결국 주라는 바이러스는 시스템을 파괴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장 감독은 바이러스를 시스템을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한쪽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바이러스는 엔딩에서 보여지듯 시스템을 부정하면서 긍정한다. 부정이냐 긍정이냐의 구분을 넘어서고 싶었다.”부산부산이 아니었다면 <성소>는 만들어질 수 없었거나, 현재 제작비보다 두세배는 더 들었을 것이다. 장선우 감독은 이 영화를 구상할 때부터 촬영지로 부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초현대식 건물부터 판자촌까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공간을 소화하기에는 부산이 적절하다고 본 것. 사실, 그의 판단이 절묘했던 진짜 이유는 부산영상위원회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부산시의 영화촬영을 활성화하고, 촬영을 원하는 제작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된 부산영상위의 도움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서면 롯데백화점 앞의 교통을 사흘 동안이나 통제했던 것이나 삼성자동차 공장 앞, 감천동 화력발전소 등을 촬영지로 제공했던 점, 부산해경의 헬리콥터를 무상으로 대여했던 일 등은 비용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 대한 인지도가 부산지역에서 유난히 높은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사랑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 성소에 대한 주의 사랑이 위대함을 강조하는 듯하다. 하지만 장선우 감독은 감성적 사랑은 물론이고 이 개념을 확장하려 했다. 이원론적인 것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얘기다. 둘이 하나로 결합할 때 에너지가 폭발한다는 얘기다. 영화의 후반부 성소와 주가 물 속에서 끌어안았을 때, 이 사랑은 비로소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선인(選人)주는 시스템을 되찾고자 하는 방장에 의해 선택된 인물이다. 이는 어찌보면, <매트릭스>의 선지자 네오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주가 선택되는 것은 예언자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불교적 인연의 결과물이다. 방장과 주는 중국집에서 만난 인연을 갖고 있다. 물론 방장은 주에게서 굶주린 자의 열정, 사랑에 대한 갈구 등 여러 가지 측면을 발견했다. 장선우 감독에 따르면 이것은 “새 세대의 징표 같은 어떤 것”이다. 주가 결국 제상(諸相)이 비상(非相)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선근(善根), 즉 착한 뿌리를 갖고 있음을 방장이 간파했던 탓이다.

성냥팔이 소녀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는 이 영화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장선우 감독이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된 것은 1998년 김정구 감독이 월간지 <키노>에 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를 읽은 뒤였다. “소녀의 바구니 가득, 빨간 라이터, 파란 라이터, 찢어진 라이터,/ 라이터 사세요, 라이터요, 아저씨 정말 성능 좋은 라이터예요./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 쾅쾅 닫히는 문들…” 등의 구절로 이뤄진 이 시에서 장 감독은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 “재림한 성냥팔이 소녀가 서울의 한구석에서 우울하게 죽어간다는 모습이 시각적 자극을 줬다”는 것이 그의 첫인상이었다. 그는 이를 해피엔딩으로 마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이를 또 가상현실의 문제와 접목시킨다는 구상이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시작이었다. 원작은 곳곳에서 뒤틀려 나타난다. ‘성소 재림’ 게임의 목표는 성소의 사랑을 얻고 그녀를 구하는 것. 구하는 길은 그녀를 얼어죽게 하는 것이다. 게이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성소가 죽으면 보너스를 준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얼어죽었던 안데르센 성냥팔이 소녀의 장선우식 버전인 셈이다. 스탭이 영화의 스탭은 평상시엔 100명선이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홍콩 무술스탭 10여명을 포함, 150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카메라도 평상시에는 3대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큰 액션신을 찍는 경우에는 7대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이처럼 수많은 스탭 중 99년 이 영화의 기획 때부터 마무리에까지 참여한 이는 두명. 인진미 조감독과 김우형 촬영감독이 그들이다. 인진미 조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고, 김우형 촬영감독은 비주얼 구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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