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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궁금하다1 -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
2002-09-19

장미정원 아래 구더기가 끓고 있네

"여보 나, 실은 게이야." 이 고백은 <제리 스프링거 쇼>의 헤드라인이 아니다. <세이프> <벨벳 골드마인>으로 뉴 퀴어 시네마의 꽃을 피운 토드 헤인즈의 신작 <파 프롬 헤븐>이 재현한 티끌 한점 없이 청결한 1950년대 코네티컷 상류층의 세계, 40, 5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한 멜로드라마의 무대에 첫 번째 균열이 날카롭게 그어지는 소리다.

울긋불긋한 가을나무 밑으로 파란 자동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면 허리를 졸라맨 완벽한 차림의 단정한 주부가 내린다. 캐시 휘태커(줄리언 무어)는 코네티컷 하트포드 일대에서 칭송받는 모범 주부. 그녀와 성공한 남편(데니스 퀘이드), 사랑스런 두 아이의 가족사진은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지방 신문기자가 취재를 올 지경이다. 정원사와 대화하는 캐시를 본 기자는 놓칠세라 펜을 달린다. "휘태커 부인은 (심지어)'니그로'에게도 친절하다." 그러나 캐시의 퍼펙트 월드는, 남편의 야근이 실은 다른 남자와의 데이트였다는 발견한 어느 밤 산산이 부서진다. 휘태커 부부는 전기충격 요법을 포함한 정신병 클리닉에 다니기로 하지만 사태는 나아지지 않는다. 비명도 지를 수 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던 캐시는 사려깊은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에게서 위안과 애정을 느끼지만 낌새를 챈 이웃은 야수처럼 분노하고 급기야 레이몬드의 어린 딸이 린치를 당한다. 소중히 가꾸어온 울타리가 감옥으로 변하고 캐시에게도 클래식 여성영화의 모든 히로인을 포획한 희생의 법칙이 적용된다. 평생 욕망해온 모든 것을 버리고 버림받는 순간에야 캐시는 목소리를 얻는다.

더글러스 서크, 킹 비도 등의 작가가 대표하는 고전기 할리우드 멜로드라마는, 당대 여성의 사회적 좌절을 거짓된 판타지로 위로하고, 희생을 찬미해 현실을 수용하게 만드는 반동적 장르로 한때 미움받았다. 그러나 훗날의 관객은 불행의 스펙터클에 도취된 이 영화들이 정열을 기울인 표현주의적 의상과 세트, 촬영, 음악이 등장인물이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른 욕망을 호소하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런데 21세기 영화 <파 프롬 헤븐>은 테크니컬러에 전신을 담그고 내러티브와 캐릭터, 시각적 연출에서 <바람 위에 쓰다> <슬픔은 그대 가슴에> <천국이 허락하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본뜨면서도 고전 멜로드라마에서 침묵과 암시에 꽁꽁 묶여 있던 오래된 슬픔과 갈등을 관객의 얼굴에 곧장 들이댄다. 여기서 동성애는 노골적으로 질병으로 불리고 '니그로'라는 호칭이 쓰이며 사랑스런 여인 캐시는 계급, 섹슈얼리티, 인종차별이 삼중으로 겹친 철조망 위에 잔인하게 비끄러매진다. 그러나 <파 프롬 헤븐>은 의도된 아이러니도, <플레젠트빌> 같은 조크도 아니다. 게이 커뮤니티 관객을 위한 소수자의 향연도 아니다. 토드 헤인즈의 인물들은 비웃음이 아니라 진지한 공감을 구하며 심각하게 사랑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영화 도입부에서 어린 딸이 거울 앞의 마네킹 같은 캐시에게 "커서 엄마 같은 여자가 될래요"라고 말할 때 실소했던 관객은 영화 말미에 가면 소녀의 소망에 공감하게 된다. <파 프롬 헤븐>은 장르의 훈련된 감식자인 퀴어 감독이 많은 것을 말했으나 충분히 말하지 않았던 고전 멜로드라마에 대한 애증을 실어 완수한 우아한 복수다.베니스=김혜리 vermeer@hani.co.kr

토드 헤인즈, 줄리언 무어 인터뷰"연약하고 결국 패배하는, 우리같은 사람들 얘기"

어떻게 이 영화를 시작했나.

토드 헤인즈(이하 헤인즈) = <파 프롬 헤븐>의 스타일은 크나큰 애정의 산물이다. 50년대 위대한 멜로드라마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 나왔다.

줄리언 무어(이하 무어) = 시나리오가 너무 아름답게 쓰여져 나로서는 쉬웠다. 토드 헤인즈는 이미지와 대사에 똑같이 천재적 재능을 지닌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감독이다. 그가 나를 위해 뭘 썼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 팩스로 받은 각본을 헬스클럽 가는 차 안에서 읽고 나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1950년대의 영화와 사회로 완전히 들어가, 현대사회에 대한 정확한 코멘트를 던지는 영화다.

헤인즈 = 1950년대의 멜로영화들 역시 섹슈얼리티와 인종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결코 소리내지 않으면서. 백인으로 통하는 외모의 흑인 여성이 등장하는 더글러스 서크의 <슬픔은 그대 가슴에>는 (정체성을 숨긴 소수자에 관한) 의미심장한 스토리다. 더글러스 서크가 스타로 만든 게이 배우 록 허드슨의 연기는 다른 독법으로 볼 때 새로운 의미와 욕구를 드러낸다. 인종과 섹슈얼리티의 두 위기 틈새에 수동적으로 낀 캐시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선정적이고 도전적인 선택이었다.

캐시 역을 연기하며 클래식 여배우 중 모델로 삼은 이가 있었나.

무어 = 헤어스타일은 라나 터너를 땄고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나직나직한 도리스 데이의 음색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전 멜로드라마로 복귀하면서 장르에 대한 코멘트를 겸했는데.

헤인즈 =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 장르에 대한 나의 앙갚음이라 불러도 좋다.(웃음) 옛날 멜로드라마들은 이제 와서 보면 사람이 진실로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 데 대담하며 급진적이며 오늘날에 와서도 슬픈 이야기다. 그 주인공들은 영웅적이지 않으며 연약하고 결국 패배한다. 우리 중 대다수처럼.

9·11 사태의 여파는 없었나.(토드 헤인즈와 제작자 크리스틴 바천은 뉴욕의 영화인들이며 <파 프롬 헤븐>은 뉴저지 부근에서 촬영됐다.)

무어 = 나중에 영화를 보고 영화 속 캐시가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얼마나 자주 미소짓는지 깨닫고 놀랐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낙천적이었고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나. 그러나 캐시는 모든 일을 겪은 뒤 현실을 인식한다. 9·11 이후 한때 미국사회가 가졌던 낙천성은 사라졌다. 그러나 유럽이 그랬듯 미국 역시 경험을 통해 거짓된 환상을 버리고 진실을 앎으로써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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