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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론(6)
2002-10-05

안전한 환상,혹은 비겁한 위로

경찰서를 도망치고(신118),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를 협박하고(신120), 한밤중에 가로수를 자른다(신127). 그 모든 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여기 그 일련의 죄를 한공주는 그 결과 외에 알지 못한다. 오직 당신만이 그 일련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죄의식 없는 죄란 언제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홍종두는 이 순간 성자가 된다. 우리는 그 성자의 내면화를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좀더 정확하게 우리가 그 내면화의 과정 그 자체이다. 홍종두와 한공주는 그 과정을 지키기 위해, 동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여튼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고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괴롭히는 세상에서 희생하면서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용서하고, 끝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유치하긴 하지만 홍종두와 한공주, 그리고 당신을 한편으로 하고 세상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이분법이 중요해진다. 당신을 제외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마치 기독교 교도들만이 예수의 기적을 믿는 것처럼. 홍종두와 한공주는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해진다. 물론 그들의 담보는 당신이다. 당신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성자의 유일한 인질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발적인 인질이다. 홍종두는 한공주가 깊이 잠들기를 바라며 나뭇가지를 자른다. 그렇다. 그건 한공주가 깊이 잠들게 하기 위해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마마께서 계속 장군님을 기다리면서 깨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여전히 똑같이 대할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면 내가 바뀌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 순진한 순응주의는 그들을 더 깊은 잠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한공주가 잠자는 동안, 우리도 안심하고 잠을 잘 것이다.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선택과의 협상, 단 한번도 가져본 것이 없는 것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불안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의 정체는 물론 현실에서의 휴머니즘의 실천이다. 당신의 이해는 이 영화에 절대적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착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대칭은 악한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 현실 속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착한 것과 악한 것 대신에 착한 것과 현실적인 이들 사이의 대립 사이에 당신이 끼어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정도에서 끝내기를 당신은 간절히 바랄 것이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현실에 문제가 생기거나 모든 것이 환상의 혼란극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창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단 한 장면도 할애할 생각이 없다. 또는 그런다고 바뀌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윤리적으로 바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다.

짝을 지우고 떠넘겨라, 이기적인 휴머니즘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 전에 환기할 만한 숏. 강간으로 몰려서 경찰서로 가는 대목에서 두개의 장면이 이상하게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공주와 섹스를 하다가 잡혀가면서(신109) 경찰차 안에서 홍종두가 “음주운전해서 교통사고 낸 거랑요, 폭행이랑요,… 강간미수요”라고 대답하자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형사가 물어본다. “너 변태지? 솔직히 말해봐, 변태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어지는 경찰서 조사실에서(신111) 다른 형사가 취조하다가 반문한다. “아, 저런 애를, 참 나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 되네, 야, 임마,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 질문은 간단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말이 목표로 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자를 보고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변태거나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그 말이 영화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오직 세상에서 홍종두만이 한공주를 여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의 비대칭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공주를 여자로 대하는 것은 홍종두가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홍종두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오해받을수록 그의 인간적인 숭고함은 더욱 고결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한공주는 여자의 자리로 물러나야 한다.

나에게 가장 이상한 대목은 마지막 장면이다. 이 이상할 정도로 한공주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어야 한다는 이창동의 강박관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도대체 (그 앞의 127신) 아파트에서 매달린 채 홍종두가 잡혀가는 신과 완전히 동떨어진 채 따로 떠도는 128신 한공주의 마지막 숏, 그래서 이것이 마지막 장면만 아니라면 용서하기 힘든 이 숏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만일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창동의 개인적인 숏이라면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때로 영화에서 정말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장면들이 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장면이 자꾸만 그 자신을 위한 숏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이창동에게는 뇌성마비 장애자의 테마가 있다. <초록 물고기>에서 막동이의 형제 중 한 사람이 뇌성마비 장애자였던 점. 그건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인물 설정이다).

그러나 서로 앞을 다투어 감동했다고 말하는 영화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이라면 나는 이 장면을 끝내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 장면은 한공주의 완전한 항복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모습은 한공주이지만, 그 목소리는 홍종두의 것이다. 이 장면의 효과는 매우 인상적이다. 카메라는 방문 너머에서 한공주를 지켜본다. 우리는 아주 불편한 자세로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의 자리에 서서 그렇게 그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사실 그녀의 빗질은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한공주를 뇌성마비 장애자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자리에서 홍종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예정된 그 ‘아내’의 자리에 가져다놓는다. 여기에는 어찌되었건 쌍(couple)을 지어주어야 한다는 뿌리깊은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재빨리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지도 모르는 짐 한공주를 슬그머니 홍종두에게 떠넘기고, 그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면 우리의 임무는 그것으로 다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두 사람이 맺어지기를 비는 까닭은 사실은 홍종두를 버리는 그들의 가족이나, 또는 한공주를 이용하면서도 방치하는 그녀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둘 중 어느 쪽도 떠맡을 마음이 없다. 또는 이 영화는 그 둘 중 누구도 책임질 생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자체로는 행복하지만, 동시에 더이상 그들에게 우리를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폐쇄된 결말이 있다. 그것이 이 아주 이상한 장면의 이기적인 휴머니즘이다. 영화는 결국 동화로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은 괴롭지만 영화는 즐겁다

감동받은 당신은 <오아시스>를 비난하는 상대에게 짜증을 내거나, 분개하거나,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건 이 영화가 건네주는 환상의 자리가 그만큼 달콤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지키려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고작 무엇인가? <오아시스>가 해피엔드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영화 <오아시스>가 만들어놓은 그 자리에서 나와, <오아시스>가 끝나고 난 다음 한공주와 홍종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별 네개를 달고 나와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내와, 결코 여동생을 내주면 안 되는 가난한 오빠 가족을 둔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당신은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약간 눈물을 흘리고 감동받아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영화관을 나설 때,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실천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당신은 감동받은 것이 아니라 안심한 것이다. 저 황량한 세상 속을 환상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홍종두와 한공주의 진심을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해심과 자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교착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환상을 부추기기 때문에 역겨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환상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와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하고, 그래서 감동을 받았다고? 어떻게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할 수 있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대답하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자리만이 숭고하고, 자비로우며, 안전한 것이다. 당신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있다. 하긴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일을 잊고 영화관에 온다는 것은 그만큼 비겁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괴롭지만 영화는 즐겁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 영화 속의 주인공이 괴롭기 때문이다.정성일 / 영화평론가 hernes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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