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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저예산영화 <낙타(들)>이 만들어지기까지(3)
2002-10-11

불모의 도심 25시,그러나 소통은 없다

12일간의 촬영이 끝난 뒤 박기용에게 남은 것은 100개에 달하는 테이프였다. 이를 편집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힘들었다. 주어진 재료만을 갖고 편집을 하겠다는 의도를 가졌던 그였지만, 어떤 식으로 마무리지을지 고민이 됐다. 두 사람이 자동차 안에 나란히 앉은 채 묵묵히 앞만 바라보며 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영화를 마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촬영된 재료들을 보면서 그냥 그렇게 해야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박기용은 이 영화를 구상하고 시작해서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를, <낙타(들)>이라는 결과물을 발견한 셈이다.

이처럼 방법론에서부터 최종 산물까지 완전히 딴판인데도, 어쩐 일인지 박기용은 <낙타(들)>을 <모텔 선인장>에서 떼어놓지 않으려 한다. 물론 전작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텔 선인장> 때는 캐릭터보다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중한 것 같다. 사실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있었는데 찍으면서 오버한 느낌이다. 조급했던 탓인지 너무 많은 것에 욕심을 부렸다는 거다”라며 ‘자아비판’을 서슴지 않는 그지만, 결국 두 영화에서 보여주려 한 것은 똑같은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모텔 선인장>도 박기용의 영화다. 그 영화를 크리스토퍼 도일이 다 만들었다는 루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모텔 선인장>이 없었다면 <낙타(들)>도 없었다는 말이다.” 두 영화의 주요 공간을 모텔로 설정한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비롯됐다. 두 영화에서 남녀들은 “욕망의 소우주인 모텔” 안에서 가장 격렬한 육체적 접촉을 거듭하지만 끝내 영혼의 소통은 이뤄내지 못한다. 사막에 비유되는 현대라는 시공간에서 관계는 소모적이고 모호하고 피상적일 뿐이다. <낙타(들)>의 제목에서 ‘들’이란 의존명사가 괄호에 묶였듯,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운명이란 하나로 결합되려는 욕망을 끝내 실현하지 못한 채 궁극에선 각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텔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또 사람들이 안주하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공간이란 점에서 다양한 사연들이 묻어 있다. 때문에 그곳은 나를 자극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욕망을 해소하지 못한다. 여기서 슬픔이 비롯된다.”

모텔과 낙타를 떠나, 사막에서 초원으로

아무리 제3자들이 떼어놓으려 해도, 박기용에게 두 영화의 관계는 주제에서나 소재에서 같은 길 위에 있는 연작인 듯하다. 불모지대에 갇혀 있는 현대인의 슬픈 초상을 그리는 이 ‘모텔 2부작’ 또는 ‘사막 시리즈’를 마친 그의 심정은 남다르다. 그건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과했던 숙제를 해결했다는 홀가분함에 가깝다. 그래선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젠 이런 주제가 좀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그는 앞으로 좀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관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제작비 9800만원과 홍보비 1200만원이 들었지만, 영진위에서 받은 디지털영화 제작지원금 7천만원과 해외 세일즈를 고려하면 제작사에 금전적인 손해는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게다가 애초부터 국내에서 상업적인 실패를 거두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염두에 뒀던 일이기도 하다.

그의 고민은 그동안 그가 다뤄왔던 세계의 폭이 좁지 않았냐는 일종의 자가진단에서 비롯됐다. “그동안 미학적인 디테일, 스타일, 이런 데 신경을 쓰다보니 내가 점점 이야기를 재밌게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아이들을 재울 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아빠 얘기가 왜 이리 재미없어’라는 불평을 듣게 됐다. 스스로도 놀랐다.” 그가 대중영화쪽으로 서서히 눈길을 돌리는 것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란 얘기다. 이제 박기용 감독은 낙타 등에 올라탄 채 사막 저편의 대륙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 것 같다. 현재로선 그곳이 신기루일지, 푸르른 초원지대일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낙타가 사막 위에 새겨놓을 발자국은 좁지만 선명한 길을 만들어내리라는 사실이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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