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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저예산영화 <낙타(들)>이 만들어지기까지(2)
2002-10-11

불모의 도심 25시,그러나 소통은 없다

과격한 디지털노선으로 급선회

당시만 해도 박기용이 두 번째 장편영화로 삼고 몰두하던 작품은 <사막> 프로젝트였다. 아이를 갖는 데 번번이 실패하는 30대 부부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놓인 머나먼 거리와 세기말의 혼란스런 모습을 보여주려던 이 영화는 99년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으나 캐스팅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2000년 <모텔 선인장>을 제작한 우노필름(현 싸이더스)을 나와 후배가 대표로 있는 화인커뮤니케이션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진행은 여전히 질척거렸다. 2001년 초 박기용이 3년 동안 붙들고 있었던 이 시나리오를 책꽂이에 도로 꽂아놓기로 한 것은 캐스팅에 더이상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일종의 전환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낙타(들)>에서 추구한 전환은 급선회에 가깝다. “시나리오도 없고, 연기도 없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이 영화의 노선은 디지털영화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그 나름의 잠정적 결론이었다. 그가 보기에 디지털영화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image making) 35mm영화와 달리 ‘이미지를 취한다’(image taking)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디지털영화란 다큐멘터리처럼 연기지시 없이 자연스레 찍고 그것 중에서 골라 이미지를 연결하는, 장편영화와 다큐의 중간 정도에 자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연기 아닌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는 이 영화의 성패를 결정짓는 관건이었다. 이미 캐스팅 때문에 진땀을 뺀 경험이 있고, “당시 상황이나 제작 여건을 고려했을 때 스타를 캐스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연극배우를 수소문했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배우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30∼40대의 평범한 배우를 찾다보니 생활문화센터의 아마추어 주부 배우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사막>을 준비하며 오디션을 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 과정의 한 학생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지만 뭔가 아련한 느낌이 있는 박명신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여주인공 명희 역으로 캐스팅된 박명신에게 박기용 감독은 어차피 베드신도 해야 하니까 친한 남자 배우가 있으면 추천해달라고 했고, 박명신은 대학로에서 함께 작업한 적 있는 동갑내기 친구 이대연을 천거했다.

시나리오 작업은 캐스팅이 확정됨과 동시에 시작됐다. 그렇다고 틀을 갖춘 스토리를 써내려 간 것도 아니다. 박 감독은 2개월 정도 배우들을 만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나눴다. 요즘 고민이 뭔지,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결혼이란 무엇인지, 불륜에 대한 견해는 어떤지 등등. 초반에는 이 대화를 연출부가 정리해 완결된 구조의 시나리오를 쓴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올바른 방향이 아닌 듯해 접었다. 결국 5월 촬영 들어가기 직전까지 <낙타(들)>의 이야기라곤 ‘40대 초반 유부남과 30대 후반 유부녀가 김포공항에서 만나 소래 포구를 거쳐 월곶으로 가 회를 먹고, 여관에서 잠을 잔 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온다’는 것 정도였다.

“모든 행위를 진짜 내가 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촬영 초반은 어수선했다. 배우들은 뭔가 준비한 연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박기용 감독은 닦달하는 것보다는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극중 캐릭터가 실제의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를 진짜 내가 하는 것 같았다”는 박명신의 이야기처럼, 차츰 배우들은 상황에 익숙해졌고 캐릭터에 동화돼갔다. 명희와 만섭이 만나는 첫 장면을 찍을 때는 영화의 상황처럼 박명신이 실제로 김포공항에서 2시간 동안 이대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둘이 자동차 안에서 이동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도 뒷좌석에는 촬영기사와 동시녹음 기사만 타고 있었다. 감독은 연기 통제라는 욕심을 비운 채, 배우들을 믿어버렸다.

10명에 불과한 극소수의 촬영 스탭이나 디지털카메라의 작은 존재감도 배우들이 자신을 버리고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을 줬다. 횟집에서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을 때도 다른 영화처럼 식당을 빌린 뒤 엑스트라를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 손님으로 꽉 들어찬 식당에서 한 테이블만을 빌려 촬영했는데도 식당 안의 어느 누구도 디지털카메라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았다. 지극히 ‘비영화적’ 공간을 맞이한 배우들은 좀더 영화 속 캐릭터로, 아니 스스로의 진짜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승욱 감독의 <나비>에서 배우들을 극한으로 몰고 갔던 디지털카메라는 <낙타(들)>에선 배우에게 자유로움을 준 셈이었다.

이런 ‘다큐멘터리식 제작방법’은 결국 박기용 감독이 추구했던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의 획득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옆자리 손님들의 대화, 휴대폰 받는 소리, 주방에서 나는 소음 등이 자연스럽게 담겼고, 생명력 있는 실제 이미지가 앵글로 들어왔다. 정사를 끝낸 남녀가 모텔 방에 나란히 앉아 비빔국수를 꾸역꾸역 먹는 장면의 극세사 같은 리얼리티 또한 이같은 방법론이 빚어낸 결과다. 그의 디지털 방법론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모더니티의 근본 주제를 성공적으로 소화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건방진 얘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서는,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원초적으로 고민해보고 싶었다. 절대로 재촬영을 하지 않고 찍어놓은 재료로만 영화를 이어붙여 영화를 만든다는 것, 인위적인 사운드를 만들거나 배제하지 않고, 동시녹음 마이크로 들어오는 사운드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 등이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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