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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저예산영화 <낙타(들)>이 만들어지기까지(1)
2002-10-11

불모의 도심 25시,그러나 소통은 없다

요즘 서울의 코아아트홀 1관에선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와 박기용 감독의 <낙타(들)>이 번갈아 상영되고 있다. 그닥 큰 소문없이 상영되고 있는 <낙타(들)>을 생각하면, 오아시스 사이의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떼의 쓸쓸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스위스 프리부르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로테르담, 토론토, 밴쿠버영화제 등 영화제에 초청됐던 <낙타(들)>은 국제적인 성가와 무관하게 지난 9월27일 이곳 한관에서만 개봉, 2주 동안의 짧은 상영일정을 ‘일단’ 마칠 채비를 하고 있다. 불과 9800만원이라는 제작비를 들인 이 초예산 디지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 박기용 감독로부터 <낙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

만약 당신이 여태껏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나날이 많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랑에는 특별하고 달콤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믿는 경우라면, 또는 매일같이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 이라면, <낙타(들)>을 보고 어떤 감흥을 얻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정말이지 <낙타(들)>은 그런 영화다. 중년을 바라보는 남녀가 우연히 만나 약속을 잡고, 서울 근교의 위락지를 찾아 맥주를 곁들인 회 한 접시를 해치운 뒤, 노래방을 거쳐 여관방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는 이 이야기에서 생기발랄함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삶의 추레한 어딘가를 날카로운 면도날로 도려낸 듯한 이 영화의 극사실주의는 경우에 따라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모른다.

부유하는 욕망, 부재하는 희망

이미 <모텔 선인장>을 통해 부유하는 욕망과 부재하는 희망을 다뤘던 박기용 감독을 떠올린다면 <낙타(들)>이 다루는 세계는 그리 낯설지 않다. 제한된 공간 속에 놓인 남녀의 불가능한 소통을 그렸고, 현대 도시의 그늘에서 창백한 일상을 영위하는 군상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하나의 맥락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 “4년이란 세월과 함께 <모텔 선인장>의 주인공들이 나이를 먹어서 이런 모습이 된 게 아닐까”라는 감독의 말처럼.

하지만 <낙타(들)>은 단순히 <모텔 선인장>의 ‘30∼40대 버전’이 아니다. 1997년 만들어진 <모텔 선인장>은 이미연, 박신양, 정우성, 진희경 등 스타와 촬영기사 크리스토퍼 도일 등의 화려한 후광을 등에 업고 출발한 ‘메이저 프로젝트’였던 데 반해, 지난해 제작을 끝낸 <낙타(들)>은 1억원도 채 안 되는 예산을 들였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연극배우 2명을 기용해 만든 저예산 디지털 프로젝트다. 사실 두 영화 사이에 놓인 간극은 이런 외양만으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화려한 색채와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줬던 화면은 흑백의 무미건조한 디지털 영상으로 바뀌었고, 격정적으로 분출되던 욕망의 세계는 비루한 일상에 대한 묵묵한 응시로 가라앉았다. 알 수 없는 절망감을 공허하게 뇌까리던 남녀의 대화는, 입에서 발설되는 즉시 공기와 함께 증발되는 무의미함 그 자체로 변했다. 그 4년 동안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낙타(들)>의 출발은 98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해 어느 날 박기용 감독은 아파트 분양문제로 경기도 시흥에 다녀오던 중 길을 잘못 들어, 소래와 마주하고 있는 서해안의 월곶이란 조그마한 포구에 다다른다. 즐비한 횟집과 모텔들에 막 불이 들어올 무렵의 이곳 풍경을 본 박 감독은 그와 다른 의미에서 ‘길을 잘못 든’ 얼굴들을 만난다. “나이든 남녀가 많이 몰리는 이곳은 ‘중년의 해방구’와 같은 느낌을 줬다. 아, 불륜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자유롭고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내심 원하고 있었던 그는 이 영화를 디지털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또 당시 그의 마음속에 들어온 이 영화의 이미지는 흑백의 대비가 강한 것이었다. ‘월곶-불륜-디지털-흑백화면’이라는 <낙타(들)>의 주요 구성요소는 박기용 안에서 이미 이때 구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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