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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렉터를 해부한다(2)
2002-11-08

우아하고 아름다운 악의 화신

렉터는 리투아니아 영주 집안의 장남이었다. 하인들은 냉정하고 말수 적은 여섯살 렉터를 두려워했지만, 네살 터울의 여동생 미샤는 목욕하는 주변을 지켜주던 오빠를 무작정 사랑했다. 평화가 깨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외딴 장원까지 밀고들어온 어느 겨울이었다. 렉터 집안은 숲 전체를 폐허로 만든 포격 와중에 몰살당했고, 살아남은 미샤는 굶주린 탈영병들에게 끌려가 도끼에 조각난 고깃덩어리가 됐다. 렉터는 미샤를 돌려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뼈를 쪼개는 묵직한 도끼소리를 흘려듣지 않았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를 올린 뒤, 렉터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만드는 능력과 엄청난 악의”로만 신을 기억하게 됐다. 고아로 남겨진 아이가 저명한 정신과 의사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죽음과 폭력을 혼자 견뎌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정신분석의들은 연쇄살인범은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환상을 충족하고자 살인을 저지른다고 설명한다. 그 분석을 따라가는 <한니발>에서 렉터는 조금씩 팽창하는 우주가 그 흐름을 뒤바꿔 과거로 돌아가기를, 미샤가 다시 살아나 마땅히 가져야 했을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기를, 아주 잠깐 긴장을 늦춘 사이 소망하곤 한다. 렉터가 희생자들의 인육을 먹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린아이답게 토실토실하다는 이유로 희생당한 미샤 대신 야만인들을 먹어 없앤다면 엇나간 삶의 흐름을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고작 2년 남짓 살았던 여동생에게, 그는 어떤 오빠도 해줄 수 없을 위안을 주려 하는 것이다. <레드 드래곤>의 감독 브렛 래트너는 “<양들의 침묵>을 보고 렉터의 귀족적인 취향보다는 상대를 압도하는 공포에 이끌렸다”고 말했지만, 이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 렉터에게 골몰한 원작자 토마스 해리스는 한걸음씩 그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의 내면을 탐험한 것 같다. 엄청난 지식을 쌓아 마음속에 ‘기억의 궁전’을 건설한 렉터. 그는 그 궁전 어느 곳엔가 자리한 ‘지하감방’ 미샤의 기억을 애달픈 발걸음으로 스쳐간다. 그러나, 이 무자비한 살인자는 지하감방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

`렉터는 컬트 아이콘` 앤소니 홉킨스는 해리스를 제외하면 누구보다도 렉터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레드 드래곤>으로 삼부작을 완성한 ‘닥터 한니발 렉터’ 홉킨스는 “렉터는 대중적인 컬트 아이콘인 것 같다. 그가 세상을 미쳐버리게 만든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어두운 면이 있는 지도…”라고 말했다. 씁쓸한 그의 말처럼, 사람들은 뿌리 깊은 상실 때문에 더욱 복합적인 렉터의 “이상한 뇌파”에 열광할지도 모른다.

렉터는 단 한순간도 평정을 잃지 않는 살인자다. ‘한니발 렉터’ 시리즈 세편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어떤 에피소드 하나를 이상하게 반복한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렉터는 심장발작을 가장해 심전도 검사를 받으면서 간호사를 물어뜯었다. 이미 눈알 하나를 잃은 간호사의 혀를 씹을 때조차, 렉터는 심장박동수 85를 넘지 않는 침착한 상태를 유지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대기에 섞여든 수십 가지 냄새를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는 예민한 후각과 중년의 형사반장을 휘어잡는 강인한 근력을 가진 렉터. 그러나 그는 수십년 전 죽은 여동생을 기억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다. <양들의 침묵> <레드 드래곤>의 사나리오 작가 테드 톨리조차 “렉터는 내 이해력을 넘어서는 인물”이라고 고백할 만큼 불가해한 이 남자는 이미 초인이다. 그리고 그 초월의 경지는 흔들림 없는 악(惡), 능력이 있더라도 도달해서는 안 될 곳이기에 더욱 매혹적이다.

렉터는 취향과 재능이라는 면에서도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섰다. <레드 드래건>에서 FBI 수사관 그래엄과 렉터가 재회할 때, 렉터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요리백과>를 읽고 있다. 그는 값비싸고 오래된 포도주나 특별하게 제조된 향수뿐 아니라 인육도 까다롭게 고르는 사람이다. 미국에 오직 세병뿐인 포도주를 선물할 수 있는 남자, 인류의 역사를 앉아서 흝어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진 남자를 누가 동경하지 않을까. 해리스는 렉터가 열대지방으로 떠나는 결말을 덧붙인 <양들의 침묵>의 감독 드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렉터는 피렌체나 뮌헨을 선택할 것 같다. 열대지방도 괜찮겠지만, 렉터라면 땀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거다.” 동감한 드미는 그 모습 그대로 마지막 렉터를 각인시켰다. 렉터의 귀족적인 취향이란 이런 것이다. 갈고 닦은 사악한 영혼에 차가운 외피를 더하는 것. 렉터는 다시금 범인(凡仁)의 손이 닿지 않는 지옥 밑바닥으로, 비상하는 것처럼 추락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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