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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애(密愛)밀담(密談) 변영주,전경린과 스치다(3)
2002-11-14

대한민국 여자들에게 불륜을 허하라!

# 주부생활 혹은 부인 내실의 철학

변: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그대로 제목으로 쓰자고 고집했는데 팬 카페에서도 오타를 낸 걸 보고 포기했다. 그 다음 후보는 <주부생활>이었고.

전: 출판사에 내가 보낸 다른 제목은 장롱 속에 걸린 여자 원피스를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제목을 따서 <부인 내실의 철학>이었다.

변: 또 하나의 가제도 그림에서 땄다. <무엇이 이 여성을 그토록 활기차고 신나게 만들었는가>라고. (폭소) 원작있는 작품을 영화화할 때는 모두가 동지, 비판자, 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읽은 원작에서 내가 좋아한 것만 취하기로 했다. 문어체이면서도 권력적이지 않은 대사도 그중 하나였다. 대사가 너무 길고 어렵다고 불평하면 “원작 표지를 봐라, 얼마나 중요하면 앞에 나왔겠냐”고 우겼다.

전: 그래도 역시 문어체 대사가 좀 겉돌지 않았나 그런데 어떤 동료작가가 원래 불륜 중에는 그런 식으로 대화한다고 하더라. (웃음)

변: 그러나 무엇보다 아까운 것은 디테일이 아니라 원작의 운명성이다. 염소 모는 할머니를 비롯해 나비마을에 가득한 원혼과 운명성을 안고 갈 것인가 버릴 것인가를 제일 먼저 선택해야 했다. 영화는 매우 심리적인 영화가 됐을 거다.

전: 프랑스 예술영화처럼 바다를 그렇게 싫어하는 감독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다니 그것도 운명 같다. 공간은 중요하다. 내가 소심해서 그런지 한국 여자가 남편이 바람 한번 피웠다고 이혼한다고 나서면 시댁도 친정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저 부유하다 스스로 나빠지면서 그 상황을 깨는 게 참 비장한 건데, 그것은 외부의 도움없인 불가능하다. 매어둔 염소들이 서로 목을 졸라 죽는 나비마을의 귀기가 바로 그런 외부적 힘이고 독자를 납득시킨다. 어떤 이는 굳이 남편의 부정을 앞세우지 않고 여자가 그냥 바람나면 안 되냐고 반문하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그런 필연성이 없으면 아무도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는다. 한 여자의 테러로 미흔의 운명이 짜여지면서 독자는 채 파악도 못하고 설득당하는 거다.

변: 그런 맥락에서 외피를 걷어내면 원작은 전경린이라는 작가의 주술 같은 이야기다. 바람 한 줄기도 미흔에게 주술을 거는.

전: 처음 그 마을에 간 미흔은 무서워서 집 밖에도 못 나간다.

변: 크리스마스 이브의 첫 장면은 남편의 불륜으로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우(남편의 여자) 때문에 중요하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동화는 귀신이 스크루지를 찾아와 끌고 가는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영우는 성탄에 나타나 미흔에게 “니가 만약 니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을 묻는 귀신이다. 영우는 미흔이 후회하지 않고 딴길로 질러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영우는 미흔의 꿈이어도 좋다. 상상으로는 가장 유명한 스타 배우를 영우 역에 캐스팅했다. 영우는 “당신 남편이 내게 뭐랬는지 알아 내가 통째로 빨아들인대” 하면서 저주를, 주술을 거는 거다. 네가 이 마법에서 풀리려면 너도 조이는 수밖에 없다고. 남편의 불륜이 아니라 영우의 저주가 미흔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 더 강렬하게 찍었다면 주술의 의도가 전해졌을 텐데 첫 촬영분이라 온갖 악조건이 겹쳐 맘만큼 못 찍었다.

전: 소설은 미흔이 마을로 이사오는 장면으로 시작해 보기도 했지만, 그건 너무 설명적이었다. 크리스마스 사건부터 배치하니 확 흡인력이 생기더라. 굉장한 공감을 얻었다. 출판사에서 영우와 효경의 전일담을 따로 써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영우 같은 여자애들 많다. 유부남들이 “나도 한번 혼났잖아” 하는 캐릭터다. 유부남들은 젊은 여자에 호기심이 있지만 먼저 접근해 오는 여자는 자기 힘으로 나중에 통제가 안 될 것 같아 겁을 먹는다고 하더라.

변: <내 생에…> 다음에 쓴 <열정의 습관>을 보면 나이 든 영우가 몇명 나온다. (웃음)

전: 영화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두 장면이다. 전라의 미흔이 모텔 방에서 홀연히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볼 때 그녀는 마치 포르르 나비가 되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맨 끝에 미흔이 증명사진을 찍을 때 김윤진씨의 웃음도 너무 맑고 순수했다. 소설에 없는 순간들이라 인상적이었나 아니다. 소설에 있었다 해도, 있었던 장면이라고 생각되는 영화 속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새로웠다.

#열정과 영원

변: ‘영원히’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제일 무서운 후배가 평생 영화할 거라는 애들이다. 영화가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웃음)

전: 영원은 사실 평생 한 마을에서 한 가지 일만 하다 죽었던 우리 이전 세대가 말할 수 있는 단어였다. 예전에는 영원이라니 웬 낡아빠진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게 됐다. 어떤 순간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영원이 생길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일생일대의 일들, 그것이 영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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