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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정성일,십대영화의 어떤경향에 주목하다(1)
2002-11-14

˝청소년 영화제보다 친구들 시각이 더 냉담해요˝

이 인터뷰를 읽으시기 전에. 나는 지난 시월 한달 동안 세 군데의 영화제 심사를 하기 위해서 273편의 단편영화를 보았다. 나는 단편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는데, 무엇보다도 단편영화는 (앙드레 바쟁의 말을 빌리면) “미래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영화들을 만든 시네아스트들은 곧 한국영화의 새로운 이름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화들을 미리 본다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달리 나는 이것이 곧 매우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단편영화들은 더이상 우리 시대에 독립영화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이 학교 ‘수업’ 워크숍 영화들이거나 졸업작품들이었다. 영화에는 학교 제도교육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거나, 얌전한 모범생들처럼 잘 정돈된 채 ‘충무로’에 간택되기를 기대하는 자신들의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또는 너무 많은 영화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별다른 이유도 없이 살인과 강간, 폭행, 시체유기와 사지절단, 자살, 자해활극, 분신, 카메라 앞에서 자위하기, 또는 똥누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좀 나은 경우이고, 날림으로 읽은 것이 분명한 철학책 구절을 빌려온 따분한 관념론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예술가인 척할 때에는 정말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대사들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구절을 베껴왔으며, 머리 나쁜 영화들이 똑똑한 척할 때는 따분해지기 시작한다. 또한 심사를 같이 한 동료들의 말을 옮겨 드린다면, 너무 많은 영화들이 홍상수 감독의 연출부가 낸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질 정도로 흉내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홍상수는 한명으로 충분하다.

더 가관인 것은 고등학생들의 영화였다. 이들은 어떤 영화들이 상을 받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것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게 뻔해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재롱을 떨어야 심사위원 어른들이 ‘깜빡 죽는지’ 아는 선수들이었다. 그래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고등학교 영화반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더니 수상을 하면 대학 진학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에 “목숨을 건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토대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옛 선현의 말씀 그대로! 진부한 말이지만 이데올로기는 물적으로 재생산되는 법이다. 나는 이 영화들이 점점 무서워졌다. 물론 또 하나의 십대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들은 학교를 때려부수고, 담임선생을 난자하고, 흡연과 음주의 자유를 달라고 하소연하고, 섹스의 자유를 허(許)하라고 외치며, 가출하고, 대학을 증오하고, 그래서 ‘십대혁명사업’에 몰두하자고 선동하는 데 모든 노력을 바친다. 혁명적이라고 아니, 그 정반대였다. 이 영화들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지난 이십년 동안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게 아무리 비관적이어도 이제 더이상 이런 일을 덮어두면 안 된다. 그것이 인과관계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물론 많은 미래의 시네아스트들이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단편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역사의 천사라고 부르는 것은 기만이다. 나는 돌아보고 다시 거듭 돌아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의 한국영화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시무시한 원인으로 더이상 떠밀리는 것을 거절하고, 남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찾아가는 영화들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다행히도 여전히 희망은 끈질긴 것이어서, 그중 몇편의 영화들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말하자면 조대완 학생의 <음악에>는 내게 그중의 한편이었다. 피아노를 배우는 한 소년이 집에 돌아와 비디오를 본다. 그 비디오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였다. 심드렁하게 보던 이 소년은 점점 이 영화에 빠져든다. 영화는 흘러가고, 소년은 잠이 든다. 그리고 저 문제의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유봉과 동호, 송화가 걸어가는 그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아무리 그 장면을 들여다보아도 그 가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거기 그 길을 그 소년이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들 가족이 떠돌던 진도와 완도의 길을 따라 걸어간다. 그 유랑길이 끝날 무렵 소년은 깨어난다. 그리고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는다. 망설이던 소년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순간 거기서 우리가 듣는 것은 가야금 소리이다. 물론 상영시간 25분의 이 영화에는 많은 약점이 있으며, 당연히(!) 서투르게 이루어진 영화의 완성도가 보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에서 한 것처럼, 자기 자신이 연출과 각본, 촬영, 녹음, 편집, 그리고 주연까지 하면서 카메라 한대를 들고 힘겹게 저 남도를 돌면서 자기 자신의 안으로 떠나는 여행길이 있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원 맨 밴드’영화이다. 그 안에서 하여튼 조대완 학생은 자기를 찾아가고 싶어한다. 그 여행길은 매우 쓸쓸한 것이었으며, 그 꿈은 전적으로 바깥의 유혹으로부터 단호하게 눈돌려 자아의 유혹에 몸을 내 맡긴 채 그것이 이끄는 대로 그 무언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대부분의 단편영화들이 바깥으로 향하는 동안 이 영화는 안을 향해서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다. 그 안에서 이 영화는 느릿느릿하게 사유한다. 여기에는 뭐라고 말하기 힘든 그 자신의 진정성이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 나는 조대완 학생이 궁금해졌고, 이 소년을 만나고 싶었다. 내가 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어린 시네아스트의 발견이라는 투의 상투적인 호들갑이 아니라, 십대영화의 시대정신과 그 안에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그의 생각을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귀기울여 들으면서 우리의 미래를 응원하기 위해서이다. 이제는 말을 바꾸어야 한다. 십대영화는 서둘러 도착한 우리의 미래영화이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hermes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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