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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 사랑에 관한 유쾌한 로맨틱코미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2)
2002-11-22

여성들의 사랑은 아름다워!

제시카와 헬렌 커플이 새로운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봐온 어떤 영화 속 커플들보다 지적이고 감각적인 조합을 보여준다. 사실 내가 아는 현실의 레즈비언 여성들은 가치관이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편이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들이 대부분 지식인이라는 사실과 상관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적잖은 영화나 드라마가 지적이고 사회생활에 성공한 여성들을 무언가 결함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공격하는 데 익숙한 나로서는 제시카와 헬렌이 스크린에 나타난 것에 대해 싱그러운 느낌마저 갖게 된다.

사실 제시카와 헬렌은 뉴욕 여피에 대한 우리의 상상과 맞아떨어진다. 뉴욕에 사는 모든 여피들이 이들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어떤 캐릭터에 대해 ‘딱이야!’라고 느끼는 것은 전형과 파격을 적당하게 오갈 때이다.

이 영화 역시 수많은 전형들을 차용한다. 맨해튼에 늘어선 고층빌딩의 스카이라인을 카메라 패닝으로 보여준 다음 빌딩 숲 어딘가에 끼어 있는 공원 오솔길에서 조깅하는 사람들로 컷하는 방식은 얼마나 익숙한지. 보헤미안풍의 그림을 전시하는 모던한 갤러리는 또 어떤가. <트리뷴>이나 <빌리지 보이스> 같은 저널을 보며 컴퓨터 앞에서 빠른 목소리로 품평을 하고, 인간에 대한 제 나름의 예리한 관찰을 바탕으로 문학적인 표현을 섞어가며 수다를 떠는 클럽문화 같은 것은 뉴요커영화의 필수요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요가에 몰두하는 뉴에이지풍의 정신문화나 자식 교육에 성공한 유대인 가정의 풍습 등, 세상 각지에서 몰려든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이 뒤섞여 공존하고 존중받는 것도 뉴욕영화의 매력이다. 이들은 재즈나 클래식, 그림이나 컴퓨터, 식이요법 등 한 가지 이상의 취미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과시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물들은 제 나름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어딘가 신경질적인 구석이 엿보인다.

새롭게 등장한 우디 앨러니즘

자, 여기까지 오고나니 어떤 배우 겸 감독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우디 앨런이다. 이 영화를 두고 ‘새로운 <애니 홀>’이라고 말한 어느 미국 평론가의 말처럼,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꿔친 우디 앨러니즘 영화다. 요컨대 로맨틱코미디와 우디 앨런이라는 널리 알려진 카테고리를 끌어다 쓰면서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꿈으로써 혁신을 달성한 셈이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이 영화가 성취한 가장 중요한 공로는 동성애와 여성의 성욕문제를 특별하고 심각한 문제로서가 아니라 대도시의 지적이고 세련된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로 여겨지도록 만들어버린 점에 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성 정체성 문제는 지난 20~30년 동안 페미니즘과 동성애 진영이 벌인 노력을 통해 글로벌 이슈로 부각되었지만,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새로운 국면으로 확산되는 조짐을 느낄 수 있다. 변화를 촉발시킨 것은 주체가 원래부터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와 체계를 통해 인공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장이다. 쉽게 말해 “우리 여성들은” “남자란”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기 어려운 포스트 페미니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또한 일부 국가에서는 1980년대부터 동성애를 의학적인 치료의 문제로 여기는 관점이 포기되면서 성적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관찰하는 공동체적 프로그램이 시험되고 있다. 결과는 성적인 이분법이 거의 완전하게 무너지는 쪽으로 나타났다. 그 공동체의 회원들은 더이상 분명히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으로, 남자거나 여자로 구별되지 않고, 젠더의 경계가 유연화된다거나 범젠더(pan-gender), 무젠더, 혹은 주기적으로 바뀌고 비지속적인 이중적 젠더로 나타난다고 한다.

즉 모두가 젠더 퀴어가 되는 것이다. 그 공동체가 전체 인류 가운데 한줌의 소수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라는 로맨틱코미디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코미디는 병적인 소수를 다루는 장르가 아니라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는 문제를 다룬다. 얌전한 제시카가 레즈비언, 아니 양성애자로 변모하는 과정을 따라다니며 함께 낄낄거렸다면, 이제 우리는 성 정체성 문제가 진정으로 성 다양성에 이르렀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현실을 너무 앞서간다고 현실이 영화를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영화가 현실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남성의 경계를 허문다

이 영화는 주연배우인 제니퍼 웨스트펠트와 헤더 예르겐슨이 직접 각본을 썼다. 뉴욕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시시하고 보람없는 배역에 지친 나머지” 직접 아이디어를 짜서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올렸다. 이것을 영화 시나리오로 변모시켜 저예산 인디영화로 밀고 나간 것도 이들이다. 이들 두명의 젊은 여배우들은 “성적인 동향에 대한 거창한 규정이나 정치적인 이야기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의 연속성”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치는 것에 대해서 치밀하게 고려했고 영리한 성공을 거두었다. 스스로가 게이이기도 한 MTV 출신의 신예 찰스 허먼 윔펠드 감독은 연극적인 흔적이 강하던 시나리오에 영화적 표현력과 다이내믹한 스타일을 덧붙였다. 영화는 2001년 LA필름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어 관객상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상을 휩쓴 뒤 미국 전역에 확대개봉되었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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