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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 사랑에 관한 유쾌한 로맨틱코미디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1)
2002-11-22

여성들의 사랑은 아름다워!

어머나 세상에!!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에 대한 소감을 가장 짧게 말하라면 이것이다. 여기서 느낌표는 꼭 두개여야 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성 정체성에 대해 나름대로 열린 생각을 가졌다고 믿어온 나를 한참이나 앞서간다. 내 감성과 사고방식은 영화들과 함께 조금씩 새로워지고 확장되었지만,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나의 고정된 이해를 한꺼번에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예에 속한다. 그것도 우울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웃겨가면서.

고정관념 깨뜨리기, 누군가에겐 불편하겠지만…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영화를 속편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상당수가 적잖은 두통과 함께 ‘말세로군, 말세야!’ 하는 염세주의 증상이 도지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공공연하게 거느리는 것도 모자라, 애인이 나타나자 일 팽개치고 창고로 달려들어갔다가 헝클어진 모양새로 되돌아오는 헬렌을 본다면 ‘저걸 정신병원에 보내거나 최소한 해고라도 해야 해’라고 씩씩거리게 되지 않을까.

혹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조신한 가정 출신에다 스물다섯살부터 마흔살까지의 모든 남자를 사윗감 후보로 여기는 어머니로부터 날마다 구박을 받는 처지의 제시카가 어느 날 갑자기 “난 여자를 사랑해. 그 친구와 동거할거야”라고 말한다면 족히 한 시간쯤은 충고를 늘어놓지 싶다. 특히 나이 찬 미혼 자녀를 둔 부모의 ‘너 언제 결혼할 거냐 증후군’을 겪어본 사람은 제시카가 맞닥뜨릴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시카와 헬렌 같은 사람이 한꺼번에 쌍으로 나타난다면 과연 나 자신부터 자유주의적인 신념을 고수하면서 두 사람을 친구나 동료 혹은 가족으로서 진심으로 환영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처럼 여자다움에 대한 관념과는 거리가 먼 분방한 성적 태도, 동성애와 양성애 문제는 늘 논란과 비난을 예상해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자연히 무겁고 비장해진다. 그런데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는 영화가 워낙 가벼우니 보는 사람의 기분도 가볍고 유쾌하다. 이것은 코미디 장르가 가진 대단한 장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딱 한 가지만 빼고는 고전적이다 못해 진부할 정도로 로맨틱코미디의 도식에 충실하다. 첫 번째 시퀀스는 대도시에 살고 그럴싸한 직장을 가진 미혼의 세련된 젊은 층의 일상을 빠르게 몽타주하면서,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단 한명의 내 님’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이들도 한 가지 정도의 결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눈에 콩깍지가 쓰인 상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돌변할 만한 무엇이다.

조만간 나타날 내 님을 돋보이게 만들어줄 진부하고 시시한 조연 남녀들이 스쳐지나가게 하는 것도 빠뜨리면 안 된다. 물론 이때는 인내심 없는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도록 빠른 몽타주 시퀀스가 사용된다. 주인공이 지치고 의기소침해져서 마침내 인생 자체가 시들하다고 느낄 무렵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나는 바로 그 님! 물론 둘은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콤플렉스를 자극하며 자존심을 긁어대거나 반대로 용기가 없어서 쭈뼛대기 십상이다. 관객은 이들이 서로 비슷한 구석이 많고 잘 어울리는 유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리지만 오직 우리의 주인공만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연결되도록 되어 있는 두 사람 앞에는 각종 신기한 인연의 장치들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이제 막 성적인 접촉을 시작해야 하는 둘의 순진하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일화들로 채워질 것이다.

아, 시시해! 그런데 우리가 보아온 수많은 로맨틱코미디영화들이 시도해보지 않은 딱 한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미혼의 남녀 주인공을 미혼의 여여 주인공으로 바꿔치는 것이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여성과 여성의 연애, 그 비밀과 호기심

상상해보라. 시시한 연애에 신물이 난 두 여자가 어떻게 서로를 발견하게 될까 여자가 여자의 몸을 만질 때는 어떤 방법으로 하나 그 느낌은 어떨까 주변에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둘은 어떤 노력을 하게 될까 비밀스런 관계에 대해 먼저 지치고 화가 나는 쪽은 누구고, 겁이 나서 계속 뒤로 물러서게 될 사람은 누굴까 둘은 어떻게 싸우고 화해할까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지속하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감수하게 될까 이때 주변에서 지지자가 되어줄 사람들은 누군가 여성 커플도 실망과 배신, 이별이라는 게 있을까 여자들끼리도 울고불고 난리를 칠까 만약 두 사람이 헤어진다면 서로 원수가 되거나 소 닭보듯 하며 옛 애인이었음을 숨기고 싶어할까, 아니면 여고 동창처럼 친숙하고 편안한 우정으로 변모할까 그들의 다음 상대는 여자일까 남자일까

딱 한 가지를 바꿔줌으로써 하늘 아래 한점 새로울 것 없는 연애담이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신선하게 변모한다. 이런 설정의 위력은 사실 심대하다. 한 사람의 인간을 남자 혹은 여자라고 부르는 순간, 영화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기존의 문화적인 관습 체계 안에서 이미 확고하게 정의된 성 역할을 탈피해서 새로운 것을 상상하기가 어려워진다. 특히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성 역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재미있고 보수적인 반복과 재생산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로맨틱코미디 안에 레즈비언 커플을 불러들임으로써 우리의 고정관념은 이중으로 도전받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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