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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감독의 인권영화 프로젝트(7)
2002-11-22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여섯가지 이유

박광수 감독은 시나리오는커녕 소재조차 잡지 못했다. 인권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여섯명의 감독 중 소재도 못 정한 이는 그뿐이다. 그는 내년으로 촬영이 밀린 장편영화 <방아쇠>의 스탭과 배우들을 기용할 계획밖에 없다면서 만남을 피했지만, 금세 끝날 것 같았던 대화는 짤막한 쉼표를 찍어가면서도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박광수 감독은 “교훈적이고 재미없는 영화말고, 액션영화처럼 한번…”이라는 고집을 갖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맏형격인 그가 다른 감독들보다 가벼운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만으로도 화제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국제인권영화제에서 회고전을 열기도 했던 박광수 감독. 굳이 ‘인권’이라는 테마를 갖지 않더라도 <그들도 우리처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 인간을 염두에 둔 영화들을 만들어왔던 그는 한없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워낙 음흉한 사람이라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임순례 감독의 전언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었다.

인권위원회가 가장 먼저 섭외한 감독인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 처음엔 분명하게 결심하지 못했다. 어떤 기자가 내 조감독 출신 중에 좋은 감독이 많으니까 섭외가 수월할 거라면서 날 추천했고, 나도 의의가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긴 했다. 감독은 아무리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더라도 지식인이다. 대중이 보는 영화를 만드는 거니까. 책임을 지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하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방아쇠>를 올해 안에 찍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직접 연출까지는 못할 줄 알았다.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다른 감독들도 다 안 하겠다고 그럴 것 같아서 아무 말 안하고 있었던 거지. (웃음) 나중에 프로젝트에서 빠졌지만, 섭외도 발이 넓은 이현승 감독이 도맡아했다. 결정을 한 건 며칠 전 <방아쇠> 촬영 연기가 확실해지면서였다. 인권위원회에 전화를 했더니 “이게 웬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냐”면서 좋아하더라. (웃음)

그래도 인권위원회는 박광수 감독의 이름을 프로젝트에 포함해서 발표했다. 참여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차별’이라는 주제를 듣고 그저 스치기라도 한 아이디어가 있을 것 같다.

→ 지금 중학생인 내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쓴 시나리오가 있다. 어떤 아이가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는데, 걔 얼굴에 점이 있었다. 그애는 일찍 죽고 다른 아이들은 자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그중 한명이 얼굴에 점이 있는 아이를 낳은 거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초등학생이 찍은 것처럼, 약간은 어설프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다큐멘터리다. 대한민국 각계각층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그 계층의 심벌로 인식할 수 있을 만한 인물들을 스무명쯤 모아 차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30초 정도 인터뷰하는 거. 잠깐 생각했다가 재미없어서 치워버렸다. 농담처럼 액션영화로 찍을까 하는 얘기도 했다. 인권위원회에선 기겁을 했는데, 난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 사이에도 차별이 있잖아” 그랬다. (웃음) 어쨌든 재미있게 찍어야 한다. 처음부터 ‘인권’이라고 하면 부답스럽지 않나. 교훈적으로만 만들면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고역이다.

주제는 심각하더라도 영화는 재미있을 수 있다. 박광수 감독이 생각하는 ‘차별’이란 무엇인가.

→ 여러 가지가 있겠지. 성차별이라고 한다면 여성 차별도 있을 거고 동성애자 차별도 있을 거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차별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싶다. 프로듀서가 들으면 펄쩍 뛸 텐데. (웃음) 사람이란 그런 것 같다. 내가 남과 다르고 그 다른 점이 좋다고 믿으면서 사는 것. 그런 주제를 여균동 감독처럼 진지하게 풀 수도 있겠지만(여균동 감독은 며칠 전 촬영을 끝냈다), 여섯명이 다 그러면 지루하다. 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차별이란 게 있구나, 나쁜 거구나, 깨달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가야지.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 같다.

→ 내 나이의 딜레마다. 사람들은 내 나이 정도 되면 남들이 알아먹든 못 알아먹든 어려운 이야기를 할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달라지는 법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재미있어하는 것도 내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촬영일정과 배우는 정해졌다고 들었다.

→ <방아쇠> 촬영이 밀리면서 스탭과 배우들이 할 일이 없어졌다. 연출부는 일단 합류할 거고, 오디션으로 뽑은 여배우 박지아와 지진희도 함께 찍겠다고 했다. 아이디어야 언제든 떠오르는 거니까 급할 건 없다. (웃음)

인권영화라는 타이틀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촬영이 늦춰지자 곧바로 마음을 결정했다. 박광수 감독에게 이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 이장호 감독이 얼마 전 TV에 출연해서 이런 말을 하더라. 전엔 사회의식을 가지고 <바보선언> 같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뒤엔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공포의 외인구단>을 만들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그게 독이 돼서 비전이 없어졌다, 이런 이야기였다. 그런 것 같다. 대중성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책임없는 대중성은 문제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시도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 굳이 거절의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 거다.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임종환 f301s@ke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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