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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감독의 인권영화 프로젝트(5)
2002-11-22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여섯가지 이유

‘영어 공화국, 쇼킹 코리아’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은 낯뜨겁다. 한달에 70만원이 넘는 수강료를 내야 함에도, 서울 강남의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불야성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대기 순번을 기다리며 학원 근처 숙박집을 전전하는 부모들도 있다. 코흘리개 아이의 영어 연수를 위해 집을 팔아치우는 부모 또한 부지기수다. 심지어 영어의 ‘L’과 ‘R’발음을 분별해서 발음하지 못한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수술대 위에 눕히기까지 한다. 이른바 ‘설소대(舌小帶) 성형술’이다. 혀가 짧아 정확한 발음이 어려운 언어 장애자들을 위해 혀 아래 설소대를 자르는 이 희귀 수술은, 국내에선 ‘아메리칸’ 구강구조를 물려주지 못한 부유층의 눈물겨운 자식 사랑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과도한 애정은, 그러나 ‘탈’을 일으키는 법. 부모의 왜곡된 욕심에 휘둘린 아이들은 탈모증에 시달리고, 실어증을 앓고, 정신과를 들락거린다. 박진표 감독의 <오디션>은 “영어 못하면 죽는다”는 코리안 생존법칙 아래 빚어진 현실의 풍경들을 하나씩 비춘다.

“한국의 영어교육 이상열기에 대한 기사가 발단이 됐다”는 박 감독은,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서울 일부 지역, 일부 층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주인공 배우를 결정하기 위해 6∼9살 아이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몇 차례 진행했다. 첫 질문에 “영어로 자기 소개를 해보라”고 했다. 반응은 둘로 크게 엇갈렸다. 어떤 아이는 유창하게 하는 반면, 뒤따라 들어온 어떤 아이는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수치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그는 실제로 “영어 콤플렉스가 특정 개인의 심리적 반응이 아니라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강요한 짓눌림의 결과”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덧붙인다.

물론 그가 딱딱한 르포성 영상들을 묶어서 내놓을 것 같진 않지만, 영어열풍이 불러온 과열양상에 대해서 일침을 놓을 것만은 분명하다. 그 역시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또래 아이들을 둔 평범한 부모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전엔 영어 못해도 불편함을 못 느꼈는데 최근에 <죽어도 좋아> 해외 상영을 위해 몇번 나갔다가 영어 못해서 혼났다. 돌아오면서 영어 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천번 했다. 그런데 다음부터 막막해지더라. 이게 단지 나 하나 어떻게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다 내가 겪는 혼란스러움을 내 자식들에게 대물려 강요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레벨을 획득하기 위해서 부모들의 왜곡된 욕망을 아이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것도 인권유린이다. 아이들에게도 제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박 감독은 아직 시나리오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다. 첫 번째 연출작 <죽어도 좋아>의 개봉을 앞두고 직접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한 아이의 시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야 할지, 아니면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결합할지, 제한된 10분이라는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좀더 고민할 문제다. “다른 선배 감독들과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허영심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이젠 까딱 잘못하면 누를 끼칠까 무섭다”고 웃는 그는 다음주까지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덤벼들 계획이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오디션>은 어떤 영화쇼킹 코리아에서 생긴 일

강남의 한 이비인후과. 어떻게든 끌고 들어가려는 젊은 엄마와 이를 한사코 거부하는 여섯살 난 딸아이의 실랑이가 병원 앞에서 한창이다. 하지만 아이의 반항은 오래지 않는다. 어느덧 아이는 전신마취된 상태로 수술대 위에 누워있다. 이어 덜 여문 여섯살 난 여자아이의 입 속이 비춰지고, 순간 날카로운 메스가 혀 아래 가느다란 설소대(舌小帶)를 가차없이 쳐낸다. 곁에 선 엄마는 입 속, 혀 아래 절개된 부위에 고이는 붉은 피를 보며, 영어 컴플렉스를 떨쳐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든든한 밑천이 될 영어 습득을 위해서라면 수술비 50만원쯤은 아깝지 않은 투자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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