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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서울유럽영화-메가필름페스티벌 <2>
2002-11-23

96시간 영화파티!

◈ 인택토 Intacto개막작/ 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딜로/ 스페인/ 2001년/ 108분

행운이란 누구를 골라 어떻게 내려지는 것일까 덧붙여 무엇만이 그 예정된 ‘선물’을 진정으로 값지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인택토>는 행운을 소유한 인물들이 벌이는 불운한 내기를 그린다. 여기서의 내기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 속에서 눈을 가리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 중 누가 부딪혀 쓰러지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가와 같은 무모한 믿음이다. 반복되면서 배가되는 그 무모함의 내기 속에서 끝내 대답은 묵시록적인 사랑의 계율로 되돌아온다. 각자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행운을 지닌 인물들, 말하자면 손끝을 스치기만 해도 남의 행운을 앗아올 수 있는 페데리코와 그를 지배할 만큼의 또 다른 행운을 소유한 샘, 그리고 추락한 비행기의 단 한명의 생존자 산츠, 가족을 모두 잃은 교통사고에도 혼자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경찰관 사라. 이들이 한자리에서 만나 서로의 행운에 기대어 그 진가를 가리게 된다. <인택토>가 웃음 대신 피를 흘리며 행운을 무게 재고 있는 것은 행운을 불운으로 인정할 수도 있는, 또는 그 반대가 되도록 할 수도 있는 무언가가 그 사이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텐 미니츠-첼로 Ten Minutes Older: The Cello

내셔널 초이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클레르 드니, 마이크 피기스, 장 뤽 고다르, 이리 멘젤, 마이클 레드퍼드, 폴커 슐렌도르프, 이스트반 자보/ 영국, 독일/ 2002년/ 95분

<텐 미니츠-트럼펫>에 이어 영화의 거장들이 들려주는 두 번째 명상록.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깨달음의 시간은 일생의 가정사를 순환적인 영겁의 순간으로 일축하여 보여준다.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굴레. 클레르 드니는 많은 장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용히 이어지는 철학적 대화들과 그 대화들을 감싸안는 창 밖의 풍경들이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게 한다. 마이크 피기스는 네개의 분할화면을 통해, 카메라의 포지션을 통해, 정과 동의 속도에 의해, 시공간의 문제를 해체하고 또 통합한다. 역사의 시간을 다루는 고다르는 여전히 선생이며 철학자이다. 그에게 시간은 끝없이 역사가 만드는 반성의 그물이다. 이리 멘젤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이고, 회상의 시간이며, 얼굴의 시간이다. 마이클 레드퍼드는 우주와 지구의 시간을 비교해본다. 폴커 슐렌도르프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단 하루로 설명될 수 있는 모기의 일생과도 같이 짧은 비유적 시간이다. 이스트반 자보의 시간은 불확실한 행위의 시간이다. 이들에게 시간에 대한 질문은 곧 영화에 대한 질문이다.

◈ 비엘 파시에르트-쾰른에의 송가 Viel Passiert-Der BAP Film 내셔널 초이스/ 빔 벤더스/ 독일/ 2002년/ 96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심장을 울리던 쿠바 음악의 여정에 이어 빔 벤더스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음악다큐멘터리. 전작이 쿠바 음악인들의 삶과 음악의 굴곡을 그 음악만큼이나 구성지고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면, 독일 록밴드 BAP의 자취를 돌아보는 <…쾰른에의 송가>는 좀 심심하고 묵직한 느낌이다. BAP은 1980년대부터 활동해온 쾰른 출신의 록밴드. 보컬이자 작사·작곡을 전담하다시피해온 볼프강 니데켄의 내레이션이 이끄는 영화는, 표준 독일어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던 쾰른의 지역어로 독일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현실을 성찰하는 BAP의 음악 세계를 풍부한 라이브 영상과 함께 보여준다. 전쟁의 폐허와 미국에 대한 환상이 공존했던 전후 독일, 밥 딜런과 롤링 스톤스 등 자신의 음악적 뿌리가 된 60년대 록의 이상과 영웅들, 음악산업과 성공에 대한 자성, 쾰른의 고유한 문화 등 정체성에 대한 사색과 현실의 맥박이 숨쉬는 록음악에 귀기울일 만하다.

◈ 아파트 #5C Apartment #5C핫 브레이커즈/ 라파엘 나자리/ 프랑스, 이스라엘, 미국/ 2002년/ 88분

“이게 네가 내게 약속한 좋은 삶이야” 남자친구 유리와 함께 가게를 털고 나온 닉키가 던지는 질문이다. 결국 그 남자친구조차 사소한 싸움으로 닉키에게 총상을 입히고 도망간다. 혼자 남은 닉키를 따듯하게 보살펴주려는 해롤드. 과연 닉키는 아름다운 삶을 다시 한번 그릴 수 있을까 영화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해롤드와 닉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고 않고, 닉키는 해롤드에 의해 아파트 바깥으로 쫓겨난다. <아파트 #5C>는 미국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들의 절망적인 삶을 히스테릭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잡아낸다. 닉키가 질문하는 그런 삶이 완성될 것이라고 믿어지는, 믿고 싶어지는 때에조차, 닉키는 결코 아파트에 머물지 못하게된다. 미국을 살아가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현실이, 또는 악몽 같은 아메리칸 드림이 주인공 닉키를 바깥으로 끌어내어, 끝도 없이 거리를 달리게 한다.

◈ 독약과 독살의 연대기 Yady, ili vsemirnaya istoriya otravlenij핫 브레이커즈/ 카렌 샤크나자로프/ 러시아/ 2001년/ 106분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올렉의 집. 새로 이사온 이웃, 아놀드가 인사를 온다. 그는 즐겁게 식사를 하던 중 아내에게 춤을 청한다. 그리고는 아내와 아놀드는 할말이 있다며 욕실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올렉은 점점 더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게 된다. 올렉이 프로코로프 노인을 만나 독살을 계획하는 것도, 그로부터 독약의 종류와 그 효능, 그리고 독살의 세계사를 교육받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와 이웃이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히려 부정을 명백히 하는 것은 아놀드의 아내와 같이 살게 되는 올렉쪽이다. 욕실이 실제 사건으로 동기화된 공간이 아니라 의심과 증오의 절망적 시선으로 상상되는 공간임을 눈치채는 순간 독약과 독살의 연대기가 영화의 현재를 치명적으로 만든다. 굉장한 코미디가 벌어질 거라고 기대하는 너비만큼, 그 반작용으로 영화는 점점 더 소름끼치는 시공 속으로 들어간다.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한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애써 고백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 영화가 독약과 독살의 배경으로 러시아의 현재를 가리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 연인 Lyubovnik핫 브레이커즈/ 발레리 토도로프스키/ 러시아/ 2002년/ 100분

“레나!, 레나!” 불러도 대답이 없다. 아내가 죽었다. 미첸카는 죽은 아내의 유품 속에서 다른 남자에게 보내는 연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편지의 주인공이 찾아온다. 연인과 남편이 동시에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애도의 감정이 두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과 연인은 그녀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더러는 공유하며, 증오와 소통의 감정으로 얽혀 들어간다. 영화는 섣불리 죽은 아내를 죄인으로 내몰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통해 믿음과 배신의 공백을 채워나간다. 그러므로, <연인>은 죽은 아내와 남편사이의 문제를 들추어내는 것도, 아내와 연인의 부정을 단죄하는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둘 사이의 모호한 관계로 도덕극을 이룬다. 슬퍼하기에도 힘든 때에 증오의 감정까지 겪어야만 하는 남편과 슬프다고 해서 그 슬픔을 드러낼 수도 없는 연인은 서로 완전한 사랑의 위치에 있지 못하다. 연인은 떠나고, 남편은 죽는다. 둘 중 누구도 그녀의 무덤 앞에서 사랑했다고 울지 못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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