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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감각의 전환기 맞은 김상진 감독(1)
2002-11-23

똑바로 선 코미디,다시 유행을 창조한다

6년간 숟가락으로 땅굴을 파서 탈옥한 사내가 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진흙투성이의 남자 차승원, 그의 벌린 입에 빗물이 가득 고인다. <쇼생크 탈출>의 팀 로빈스 못지않게 폼을 잡지만, 그 순간 함께 탈옥한 사내가 한마디 한다. “지랄을 해라. 지랄을.” <광복절 특사>는 두 탈옥수, 차승원과 설경구의 이야기다. 알려진 대로 천신만고 끝에 감옥에서 나온 두 남자는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한다. 그들은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설경구의 바람난 애인 송윤아의 결혼식도 막아야 한다. 그들의 탈옥사실을 감추려는 교도소에서 없어진 죄수를 대신해 교도관들이 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과연 설경구와 차승원은 감옥으로 무사귀환할 것인가

이야기 설정에서 드러나듯 <광복절특사>는 물구나무선 탈옥영화다. 탈출이 아니라 감옥으로의 귀환이 절박하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코미디, 김상진 감독의 영화에서 이처럼 뒤집힌 상황을 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4인방이 기껏 하는 일은 주유소의 질서를 뒤죽박죽으로 흔들어놓는 것이었고, <신라의 달밤>의 선생님은 깡패보다 거친 말투와 행동으로 학생들의 ‘형님’이 되지 않았던가 아이디어로 보면 <광복절특사>는 김상진 영화가 즐겨 다뤘던 아이러니를 적당한 변주를 곁들여 되풀이하는 영화다. 탈옥한 죄수는 교도소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하고, 교도관은 죄수들 머릿수를 맞추느라 감방에 갇히는 우스꽝스런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결과로 치닫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한마디로 <광복절특사>는 <주유소 습격사건>의 정반대편에 있는 영화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4인방이 주유소를 점령해놓고 유유자적 즐기는 것과 달리 <광복절특사>의 두 주인공은 원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기를 쓴다. <신라의 달밤>이 모범생에서 조폭 보스로, 깡패에서 선생님으로 엇갈린 운명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데 비해 <광복절특사>는 소동이 일어나기 전, 운명이 갈리기 전의 평정상태를 간절히 소망한다. 무엇보다 <광복절특사>에는 “어려운 말 하는 새끼들, 다 죽여버려야 돼”라고 내뱉던 과격함이 없다. 대신 “우리가 정말 쓰레기냐 우리가 정말 인간 말종이냐”는 호소가 교도소의 폭동을 진압한다. 그것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딴따라로 나왔던 강성진이 연기하는, 폭동의 주동자 용문신을 통해 강력한 암시를 던진다. 엔딩에서 용문신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조용히 물러난다. 상징적인 의미지만 <광복절특사>는 <주유소 습격사건>이 일으킨 반란을 잠재우는 영화인 것이다.

“이젠 유행을 다시 앞서가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는 김상진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스스로 <주유소 습격사건>이 조폭코미디의 원조라 주장한 적은 없지만, 그는 조폭코미디 유행의 시발점이 <주유소 습격사건>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조폭 마누라>의 신은경, <달마야 놀자>의 박신양, <두사부일체>의 정준호, <가문의 영광>의 유동근은 <주유소 습격사건>의 4인방이 보여준 단순, 무식, 과격함을 닮았다. 무엇보다 김상진-박정우 콤비의 두 번째 영화가 <신라의 달밤>이라는 사실은 <주유소 습격사건>의 태반에서 잉태한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보여줬다. 단순한 캐릭터와 엉뚱한 상황이 빚어내는 폭력과 욕설의 카타르시스는 평단의 비판을 따돌리며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 하지만 <주유소 습격사건>은 유행의 첨단을 걷는 캐릭터를 등장시킴과 동시에 충무로 영화의 뿌리깊은 악습 하나도 되살려놓았다. 바로 대충 찍고 이야기의 논리를 무시해도 캐릭터만 재미있으면 관객이 찾는다는 믿음이다. 90년대 중반 유행했던, 박중훈 주연의 코미디 <할렐루야> <똑바로 살아라> <돈을 갖고 튀어라> 등은 대표적인 예다. 한때 박중훈표 코미디로 불렸던 이들 영화는 배우 박중훈이 아닌 캐릭터 박중훈의 영화였다. 그리고 이중 <돈을 갖고 튀어라>는 김상진 감독의 데뷔작.

˝<주유소 습격사건>에 비하면 파괴적인 쾌감이 적고 <신라의 달밤>에 비하면캐릭터의 감칠맛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주류 코미디의 유행에안주하지 않겠다는 <광복절특사>의 태도는 전작들보다 성숙한 것이다.<광복절특사>는 새로운 유행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는 아니지만, <주유소 습격사건>이후 김상진 영화의 또 다른 전환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상진 영화의 궤적이 90년대 중반 이후 주류 코미디의 변천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그가 강우석 감독의 수제자이며 <투캅스3>의 연출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렇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이 개봉하고 나서 김상진 감독은 “<투캅스3>를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이런 유의 코미디로는 강우석 감독을 넘을 순 없다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유소 습격사건>으로 자신의 색깔을 발견했다고 여겼고 그래서 <주유소 습격사건>의 코미디 스타일을 스스로 ‘쌈마이’라 부르며 즐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조폭코미디들은 <주유소 습격사건>식 코미디가 김상진 감독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걸 입증했다. <광복절특사>가 <주유소 습격사건>의 반대편으로 이동한 맥락도 여기 있다. 그는 범람하는 유행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했고 그런 결심은 김상진 영화에선 처음 보는 깔끔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그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조명까지 통제하며 찍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조폭코미디와 선을 그으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이런 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광복절특사>를 통해 김상진 감독이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 영화가 시도하는 풍자는 아직 무르익은 표현수단을 얻지 못했고 이야기나 캐릭터의 결함도 쉽게 눈에 띈다. <주유소 습격사건>에 비하면 파괴적인 쾌감이 적고 <신라의 달밤>에 비하면 캐릭터의 감칠맛이 떨어진다. 그렇지만 주류 코미디의 유행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광복절특사>의 태도는 전작들보다 성숙한 것이다. <광복절특사>는 새로운 유행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는 아니지만,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김상진 영화의 또 다른 전환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글 남동철 namd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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