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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지아장커를 만나다 <2>
2002-12-07

˝5세대의 배신을 넘어, 지하전영은 전진한다˝

정성일: 오늘은 먼저 당신의 세 번째 영화 <임소요>(任逍遙: Unknown Pleasures)에 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야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당신은 내게 두 번째 영화 <플랫폼>을 만들고 난 직후에 준비했었던 영화는 (두보의 시구를 옮긴) <눈 속을 걸으며 매화를 찾아서>(雪中探梅)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영화는 <임소요>입니다. 제목만 바뀐 것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영화를 만든 것입니까

지아장커: 완전히 다른 영화입니다. 저도 <임소요>를 찍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플랫폼> 직후 디지털 다큐멘터리 <공공장소>를 두 번째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의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주에서 돌아온 뒤로 계속 ‘디지털 삼인삼색’에서 찍었던 따퉁(大同)이란 도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기로 다시 돌아가서 이 영화를 찍었습니다. 아마도 디지털을 못 잊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찍었는지도 모르지요. 빨리 돌아가서 디지털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지하전영, 위기인가 희망인가?

정성일: 2002년 지금 중국 지하전영의 상황은 어떤 것입니까 바깥에서 보는 우리에게는 그게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변화의 조짐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지아장커: 아주 큰 변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커다란 위기에 닥쳤다고 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희망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새로운 영화감독들이 비주류인 지하전영의 방법으로 영화 만드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 사이에 지하전영 자체의 좋지 않은 상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를 모방하는, 내용상에 있어서 서로 비슷한 영화의 출현. 그러면서 자꾸만 서방세계의 국제영화제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고려하게 되고, 심지어 일부 감독들은 지하전영을 찍는다는 자체를 하나의 지름길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경향인데 중국 국내의 대중매체와 지하전영의 관계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패션잡지나 여성대중잡지들에서 지하전영을 맥락없이 저항하는 모습으로 상품화해서 소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우스운 상황이지만, 안에서는 매우 심각한 것이 지하전영을 한다는 것만으로 관심을 받게 되고, 그러다보니 그 안에서 원래 지하전영을 만들고자 했던 감독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지하전영을 위한 공간들 자체가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는 제5세대 선배감독들에게서 이율배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니, 차라리 배신입니다. 첸카이거는 올해 <북경 바이올린>을 만들고 난 다음, 중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남방주말>이라는 신문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자기 생각에는 이 영화가 중국 내에서는 흥행에 성공한 것 같고, 게다가 120만달러에 미국에 팔렸다고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험영화를 찍는다는 것, 예술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관객에게 아주 이기적인 행위이다.” 그 말은 15년 전 <황토지>를 만든 자신이 이기적인 행위를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첸카이거의 경우에는 중국에서 대중의 공신력이 아주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첸카이거의 생각을 따라서 대중도 의심없이 그러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너희들 지하전영을 하는 감독들이 아무리 영화를 찍어도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이것은 너희가 하고 싶은 것만을 하는 아주 이기적인 행위이다, 라는 생각이 이제는 안으로부터, 그리고 밑에서부터 중국에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 영화산업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영화산업이 나빠지고 있는 상황을 그 사람들은 지하전영을 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정성일: 한편으로는 이런 경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에 저는 왕차오의 첫 번째 영화 <안양의 고아>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매우 좋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 지하전영 사이에서 이 영화는 매우 낯설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영화라기보다는 유럽영화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이러한 것은 지하전영에서 점점 더 서방세계영화에 경도돼가는 하나의 위험한 경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아장커: 아주 위험합니다. <안양의 고아>는 중국의 환경을 벗어난 것들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정 선생님의 생각과는 달리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 안에 나오는 스토리는 그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왕차오가 다루는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 그것은 바로 영화이기 때문에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미학적인 성취가 인간에 대한 현실에서 벗어났을 때, 그런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물 자체가 그 영화의 미학적인 측면에만 충실했을 때도 저는 그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냥 제 생각일 뿐입니다. <안양의 고아> 속에 나오는 흑사회, 마피아 갱이 병원에서 나왔을 때 던지는 첫 번째 대사. “나는 황하를 보러 갈 거야.” 그것은 그 인물이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가 그 인물로 하여금 거기에 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황하라는 것은 중국 문화에서 아주 상징적인 부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깡패가 그런 문화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인물이 인물 자신을 넘어서는 것, 초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물 자체가 인물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벗어날 때 그 인물에는 인텔리적인 모습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허우샤오시엔 영화에서 배운 것입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위, 인물들의 모습 자체가 그 인물의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 작가가 그 안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인물과 그 인물 주변 환경에 묻어나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