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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열리는 장 뤽 고다르,그 여백의 영화세계 <2>
2002-12-12

썩은 세상,나는 영화를 가지고 싸운다

2. 조금 다르게 보기

고다르에 대한 생각들, 아무리 그를 부추기고 위대하다 말을 해도 그의 영화를 보면서, 그에 대해 읽으면서, 그에 대한 비평가들의 말을 들으면서, 의아스러울 것이며, 모호할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두 가지의 결과지어지는 태도들: 그래도 다들 중요하다 말하니까 졸립고 건조하더라도 눈을 부릅뜨고 뇌를 신경줄이 끊어져라 긴장하면서 쳐다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은근히 가슴속에는 울화도 있다. 울화, 혹, 내가 잘못되었더라도 고집스럽게 말하고 싶은 것. 이거 전부 사기가 아닌가 예술은 느껴지는 것일 텐데 언제부터 이렇게 머리로 하는 것이 되었는가 부질없어짐. 은근한 기분나쁨.

이런 생각은 사실 전혀 틀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고다르를 높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는 정말로 단순하며, 거칠고, 생경하고, 산만하며, 장난 같다. 총을 맞고 뛰어가는 그 벨몽도의 우스꽝스런 모습이라니…(<네 멋대로 해라>) 푸른 눈의 우수, 알랭 들롱의 전혀 그답지 않은 어색함이라니…(< 누벨바그>). 이런 점에서 사실 우리에게 알려진 ‘고다르’는 거의 완전한 껍데기이다. 리처드 라우드의 <장-뤽 고다르>, 그리고 여느 비평들, 여느 강좌들, 여느 술자리들… 전부가 과잉이며 거짓말이고 우스운 지적 권력쌓기이다. 이것들은 원래,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어진 방편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이제 대상에 관한 이해를 넘어서서 자신들이 아는 것들을 주장하고, 그렇게 단언함으로써 대상을 오히려 관객으로부터 떼어놓는다. 보라, 예술이 얼마나 힘들어졌는가 이제는 아주 복잡한 수사없이 ‘감동’ 한마디로 예술을 말하기에는 늦어버렸다. 가짜 고다르, 가짜 누벨바그, 가짜 해석들… 고다르는 말한다. ‘나는 도처에 있다. 도처에서 나를 말하고, 나를 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다. 가짜들일 뿐이다!’

개념들 고다르를 설명하고 포장하는 온갖 수식어구의 개념들 정치, 좌파, 반영주의, 작가주의, 브레히트, 소격효과, 이 거대한 거짓말들. 정작, 고다르가 팽개쳐버리는 것은 바로 개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 정도씩을 공유하지만 그뿐이다. 어느 것도 우선권을 지니고 고다르를 싸안을 수 없으며, 어느 것도 심지어는 고다르에게는 단순한, 없어도 무방한 부분일 뿐이다. 고다르는 단순하며, 경쾌하다. 그의 세계를 복잡하게 만든 것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별로 모르면서 직업에 취해 말을 하는 비평들, 어긋난 비평들일 뿐이다!

고다르에 대한 이해의 첫 번째, 그것은 그의 영화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이력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비평으로 시작했으며, 그것을 영화 만들기로 생각했으며, 영화에 대해 사색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그는 니콜라스 레이, 하워드 혹스, 프리츠 랑, 존 포드, 프랭크 카프라, 빈센트 미넬리, 뮤지컬에 열광했으며, 찬사를 보낸 자였다는 것은 이 경우, 덤이다. 그는 말한다: 니콜라스 레이, 그것이 영화이며, 영화의 재발명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고다르에 대해서 알려진 것들을 정리해보라. 현대영화, 누벨바그, 허깨비 같은 과거의 영화들에 관한 공격, 할리우드에의 거부 등등. 알고 있는 것과 해석한 것 사이에 아주 커다란 틈새가 있지 않은가 마치,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틈새같이 말이다. 우리가 고다르를 개념에 묶어 설명할 때, 이 틈새는 메워지지 않는다. 그는 이중인격자인가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것들을 한편으로는 공격한다! 그렇다면,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취하는 태도와 사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틀린 사기꾼일 것이다. 이 틈새는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여기저기 딴말을 유포하는 신문처럼, 오랫동안을 이름만 바꿔가며 그러나, 오직 ‘수구’로 연명해온 우리의 거대한 그 정당, 정치꾼들처럼 말이다.

틈새를 메우자, 그리고 되도록 고다르에 가까이 다가가보자. 고다르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이 틈새를 메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그를 알고 싶어하고, 그의 영화를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는 누구인가 먼저, 60년대, 그는 말했듯이, 니콜라스 레이에 경탄하고, 혹스에 찬미를 보내고, 랑, 포드, 카프라, 미넬리에 즐거워한다. 그런 자가 영화를 만들었다. 이율배반이 아니라면, 이중인격자가 아니라면, 따라서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의 영화는 그들의 영화를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 어줍잖게 영화 만들기의 반영 정도가 아니라 말이다.

‘니콜라스 레이, 그것이 영화이다!’- 이 경우에, ‘영화’란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들 먼저, 그 다음에 이 말의 설명으로 가자. 영화가 무엇인가 혹스, 카프라, 포드, 미넬리, 뮤지컬들….

이미 던졌던 우리의 말 속에 이 ‘영화’가 있다. 영화는 이야기이며, 소파 위의 여행이다! 상상의 세계, 밀도있게 구성된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의 이동. 그러나, 그리 먼 데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세계는 허구지만, 사실 우리의 것에 대한 보고서이며, 우리에 대한 시선이다. 영화는 우리를 본다. 세계를 본다. 그가 보는 방식들이 우리에게 보여진다. 우리는 그렇게 카메라에 의해 포착당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포착을 보고 있는 것. 영화의 이야기는 따라서 영화가 우리보고 ‘당신들은 이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 것이다’라고 제시해주는 것이다. 영화, 그래서 그것은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 우리를 이러저리 둘러본, 아이레벨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움직임으로, 다양한 크기로, 다양한 길이로 끊어내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카메라의 기능이 있고, 몽타주의 기능이 있다. 그것은 보고 포착하고 포착의 조각들을 잇는다. 이 환상적인 고리, 어떤 점에서 영화가 환상적인 것을 자신의 즐거운 내용으로 다루는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고다르는 이 영화를 결코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위대한 발견이고, 위대한 인류의 자산으로 꼽는다. <영화사>라는 제목은 그래서 틀렸다. 그것은 엄밀히 ‘이스투와르 뒤 시네마 아벡크 앵 에스’(Histoire(s) du cinema) 즉, <영화의 역사 그리고 이야기들>이다. 영화들은 역사를 만들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허구덩어리면서 우리가 지표 위에서 살아온 증거로서의 역사이다!

이런 점에서 고다르는 할리우드 클래식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를 반대편에 놓으려고 하는 순간에 그는 실제의 고다르가 아닌 셈이다. 다만, 정말로 중요한 부분, 틈새를 벌이고 메우는 아주 민감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니콜라스 레이이다. 그는 다른 할리우드를 칭송했다. 그리고는 레이를 영화라고 하며 재발명이라고 했다. 우리의 눈은, 머리가 아니라, 뇌가 아니라, 우리의 눈은 깊어야만 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보는데, 좋아한다면 그것에 대해 깊은 애정의 눈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조폭들의 행진’이라도 그저 단순하고 웃기고 액션이라도 그것을 영화라고 여긴다면, 그것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사실 영화를 보고 있지 않다. 그저 웃기는 것을, 비장한 것을, 드라마틱을 보고 있다. 영화가 그래서라기보다는 사실 우리가 쇼를 보는 관객이어서 그렇다. 어떤 영화도 영화인 이상,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 영화가 위대하다면 그래서 위대하다. 아둔한 감독들까지 자신이 가진 장점으로 덮어버리는 것.

레이는 전혀 다르지가 않아 보인다. 그도 클래식이며, 이야기이다. 더 드라마틱하며, 더 극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보면, 다른 게 있다. 레이 이전에 영화들은 아주 완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레이가 느슨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것의 완결은 언제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들이 극적이며, 극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충동이란 전혀 없으며, 느닷없는 전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관계, 이것과 저것의 아주 철저한 선들. 그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라. 레이는 그것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이유없음, 느닷없음,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모호함의 과정들. 그러니까 요지는 이렇다. 극과 극 사이에 사실 생략된 부분들, 인과관계라고 했던 것들 사이의 느슨하고 우유부단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생각의 과정들, 충동들, 그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가 제목이 <이유없는 반항> 이래서가 아니다. 제목은 적절하지만, 실제로 내용을 보라. 그 우리 삶의 모호함의 투성이들. 왜 이런 행동을 하며, 왜 울며, 왜 가만히 있으며, 그것은 설명도 달 필요가 없다. 우리의 일상이며, 우리의 삶이고, 사건이다. 레이는 영화를 만들며, 그 영화를 비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영화, 새로운 방법, 그것이 재발명인 것이다.

고다르는 날카롭다. 극으로서의 영화에서 그 극을 비껴가는 법, 그것의 중요성을 이해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극이 아니며, 현실이고 영화는 그 현실을 어느새 파고들고 있었다! 극이 우리의 삶에 대한 환기, 그것을 빛나게 하고 관조하게 한다면, 현실에 대한 조명은 그렇게 해서 느슨해진 우리의 삶을 바짝 조이지 않는가 우리는 경직되며, 의식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다르는 레이의 영화를 끌어들인다. 여기서 60년대 고다르에 대한 완전한 오류 하나. 다음의 줄거리를 보라.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건달이며 도둑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그는 그녀와 이 감옥 같은 도시를 떠나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곳, 외국으로 가려 한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차를 훔치고, 마르세유에서 그녀가 있는 파리로 간다. 그러나, 경찰에게서 추적을 받게 되고, 그는 경찰을 사살하게 된다. 도망자, 그는 파리에서 그녀를 만나고 도망갈 준비를 하지만, 그녀는 혼란스럽다. 사랑하지만, 자신의 삶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그는 경찰과 대치하다 사살당한다. 총을 맞고 비틀거리는 그, 안타깝게 그를 따라가는 그녀….

이것은 장르이다. 형사물, 멜로, 액션…. 이 줄거리의 이음새를 늘리고 거기에 극적인 장면들, 총격장면,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을 삽입하면, 할리우드가 되는 것이다. 고다르는 장르를 만든다. 이것이 <네 멋대로 해라>이며, 우리가 새로운 영화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가 이야기는 이미 존재하는 구성이고, 장르이지 않은가 장르, 이야기,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삶에 관한 조명인 것이다. 고다르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니콜라스 레이로부터 얻어낸 것, 즉, 그 이음새를 잇지 않으며, 그것이 현실로 살아나게 놔두며, 결코 멋있지 않으며, 결코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포착한다. 총격장면이 멋있을까 남녀의 만남에는 음악이 어디선가 들리는가 총격장면은 느닷없는 것이며 순간적이고 단순하다. 사랑은 둘 사이에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음악과 함께 포장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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