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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감독의 독립장편영화 <그집앞> [1]
2003-01-04

골방에서 길 위로, 욕망이 나를 데려다 주리라

“컷!” “롤 더 사운드!” “스피드 업!” “슛 들어갑니다!” 영화 <그집앞>의 촬영 마지막 날, 서울 대학로의 작은 술집 ‘바스키아’에는 김진아 감독과 베니토 스트란지오 촬영감독, 한국인 스탭이 내지르는 영어와 우리말의 촬영사인이 뒤섞여 짱짱 울려퍼졌다. 그중에서도 작은 몸집의 깡마른 김진아 감독의 목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녀는 미국 칼아츠영화학교 재학 중 거식증을 앓는 스스로를 찍은 비디오다이어리, <김진아의 비디오일기>가 전주국제영화제에 상영되면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그집앞>은 김 감독의 첫 극영화이다. 이 작업은 그녀의 성마른 목소리 만큼이나 그녀 스스로의 변화를 동반하는 일인 듯했다.

김진아 감독은 전작인 퍼포먼스 다큐멘터리들, <빈 집>이나 <다채로워지는 아침> <김진아의 비디오일기>에서 유난히도 ‘조용한’ 사람이었다.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며 자폐적으로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스스로의 모습과, 거기서 벗어나려고 시도한 제의 같은 퍼포먼스들을 기록한 전작들은, “다른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혼자서 스스로를 찍은 작품이었다. 그 영화들에선 긴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작업의 결과로 거식증을 극복하고 수년 뒤 시작한 이 극영화 작업은 그녀의 다큐와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전과는 다른 태도와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집앞>은 가인과 도희, 두 여자와 희수라는 남자 셋이 등장하는 내밀한 심리 드라마이다. ‘집에 머무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가인(최윤선)은 <김진아의 비디오일기>의 주인공인 감독 자신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 인물. 거식증을 앓으며 집안에 칩거하는 미국 유학생이다. <그집앞>에서 가인은 거식증에 걸려 괴로워하는 자신을 감당치 못해 남자친구 희수(정찬)마저 한국으로 떠나버리자, 허전함에 못이겨 준이라는 이름의 유부남과 섹스를 한다. 그리곤 더욱 심한 거식증에 빠져든다.

가인과 동전의 앞뒷면이라 할 만한 다른 인물 도희(이선진)는 성적 불감증에 걸린 인물로 준의 아내다. 도희는 남편과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홀로 유럽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와 섹스를 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자 낙태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온다. 임신 뒤 도희는 예전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몸 안에서 성욕이 마구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길 위를 떠도는 여자’라는 이름뜻 그대로 가인과는 반대로 집안에 머물지 못하고 길 위를 배회한다. 그러던 중 한국으로 돌아온 가인의 남자친구 희수를 만나게 된다. 뜻밖에도 희수는, 도희에게서 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내 안에 다른 여자가 숨어 있다.

가인이 김진아 감독 자신의 모습인 데 반해 도희는 감독이 “내 자신 안에 숨어 있던 그 누구”를 발견해 만들어낸 인물이다. 오랫동안 일상적으로 찍어온 비디오일기들을 편집해 <김진아의 비디오일기>라는 작품으로 다듬는 동안 그녀는 습관적으로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상들을 메모했는데, 그걸 모아놓고 보니 ‘도희’라는 또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고. 도희의 등장으로, <그집앞>은 식욕과 더불어 성욕을 중요한 모티브로 삼게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정리해놓고 보면 <그집앞>은 꽤 밀도있는 사건 중심의 드라마로 보인다. 유학생 커플의 이별이 있고, 유부남인 다른 남자와의 섹스가 있고, 유럽여행이 있고, 한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있고…. 그러나 <그집앞>의 시나리오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배반한다. 아니 시놉시스는 <그집앞> 시나리오에 대한 ‘지난 줄거리’에 가깝다. 영화는 이미 대부분의 사건이 종료된 뒤 출발하기 때문이다.

가인을 비추는 카메라는, 이미 남자친구인 희수가 떠나버리고 유부남과의 우연한 섹스도 지난 뒤 집안에서 예전에 희수와 찍었던 비디오를 보며 소일하는 그녀의 모습만을 담는다. 준과의 섹스, 희수와의 이별 등은 전화의 자동응답장치나 가인의 혼잣말 같은 내레이션으로 알려진다.

“저… 준의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 오래 전부터 한번 통화하고 싶었는데…. 따지려는 게 아니고… 그냥 한번 얘기했으면 해요. 다시 전화할게요.” 준의 아내인 도희의 목소리가 전화의 자동응답장치에서 들리고, “그의 집에서 관계를 맺은 건 처음이었어. 그리고 이제 그와는 마지막이야.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는 불감증인 아내를 대신할 여자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나는 그저 네가 떠난 뒤 내 몸을 덥혀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희수야… 나는… 아직도… 네가 밉다. 나, 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2년 전 희수 너와 헤어진 다음날로 돌아가 모두 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가인은 혼잣말처럼 희수와의 관계 그리고 이별을 관객에게 고지한다. 가인이 집안에서 보는 비디오는, 캘리포니아의 사막으로 희수와 여행을 갔을 때 희수가 자신을 찍었던 테이프. 실제로 김진아 감독이 직접 찍은 이 테이프는 영화상에서는 희수가 찍은 것으로 설정돼 있어 자연히 테이프 안에서도 보이는 건 가인뿐이다. 결국 가인의 촬영분에는 가인 이외의 그 누구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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