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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와 그의 영화세계 [1]
2003-01-04

섹스와 폭력의 명장,내밀한 기억 속으로

이번에 개봉되는 <피아니스트>-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것- 를 통해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이 영화가 그다지 실망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악마의 씨>(1968)나 <차이나타운>(1974)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가 1960년대에 만든 일련의 뛰어난 작품들을 모두 보아온 사람들에게 <피아니스트>는 다시 한번 ‘혹시나’ 하는 기대가 좌절되는 경험을 맛보게 할지도 모른다(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비터 문>(1992)만큼이나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안제이 바이다 이후, 로만 폴란스키는 어쩌면 그뒤를 잇는 폴란드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는 그렇지 못했으니 폴란드 영화계로서는 안된 일인 셈이다. 폴란스키는 60년대의 새로운 영화적 분위기를 맘껏 담아낸 데뷔작 <물 속의 칼>(1962)을 발표한 뒤, 곧바로 고국을 떠나 잠시 프랑스에 거주하다 영국에서 두 번째 영화 <혐오>(1965)를 완성했다. 아직 폴란드에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그는 폴란스키와 함께 <물 속의 칼>의 각본을 집필했다- 가 남아 있었지만 그 또한 1967년에 발표한 영화가 상영금지된 이후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1970년대 폴란드 영화계의 부흥을 이끈 것은 새로이 나타난 일군의 감독들- 크지슈토프 자누시,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아그네츠카 홀랜드 등- 과 (다시 한번) 안제이 바이다였다.

60년대 유럽영화에 그가 있었다.

사후적인 진술에 불과한 것이지만, 사실 위와 같은 일은 ‘폴란드영화’라기보다는 ‘60년대 유럽영화’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물 속의 칼>을 폴란스키가 데뷔작으로 내놓은 그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궁지>(1966)와 희한한 공포()영화 <용감한 뱀파이어 킬러들>(1967)- <뱀파이어의 춤>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을 영국에서 제작한 뒤 이번에는 미국으로 옮겨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악마의 씨>를 내놓는다. 폴란스키의 1960년대는 이렇게 유랑하는 가운데 지나갔다.

폴란스키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잘 알려진 사실들. 그의 부모는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어머니는 나치의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그는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여배우 샤론 테이트와 결혼하지만 그녀는 악명 높은 살인광 찰스 맨슨의 패거리에 의해 살해당한다. 한편 1977년에는 13살 소녀를 강간한 혐의를 받아 수감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미국을 떠나 죽은 아내 샤론 테이트가 가장 좋아한 소설이었다는 토마스 하디의 <테스>(1979)를 영화로 만들었다.

폴란스키의 영화를 보면서 자꾸 이러한 그의 경험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영화와 자신이 겪은 사건들을 관련지어 언급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급적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맥락으로부터 다소 거리가 있는 소재들을 취해 영화로 만들어 오곤 했다. 따라서 200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피아니스트>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라면 아주 예외적인 영화가 되는 것이다.

알레고리적인 성향이 두드러진 폴란스키 영화의 기원은 그의 경력 초기에 만들어진 단편들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1958년에 만든 <두 남자와 옷장>은 제목 그대로 두명의 남자가 커다란 옷장을 함께 들고 바다에서 뭍으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다가 급기야는 깡패들- 이 깡패 패거리 가운데 하나로 로만 폴란스키가 직접 출연해 ‘액션’연기를 몸소 보여준다. 그는 <차이나타운>에서도 이와 유사한 역할을 맡아 연기한 바 있는데 극중 탐정 제이크(잭 니콜슨)의 코를 칼로 무자비하게 그어버리는 인물이 바로 그이다- 에게 흠씬 두들겨맞은 뒤 다시 옷장을 들고 바다로 향한다. 이후의 영화에서 더욱 과격한 형태로 보여지게 될 폭력 묘사 및 재치있고 신선한 비주얼이 인상적인 영화로 흡사 루이스 브뉘엘의 초기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에 잠기게도 만든다. 한편 탐욕스러운 주인과 바보스러운 하인의 모습을 통해 거기서 빠져나올 길 없는 권력의 성격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뚱뚱이와 홀쭉이>(1961),- 이번엔 폴란스키가 홀쭉이 역을 맡아 연기한다- 서로 편안히 상대방이 끌어주는 스키썰매 위에 올라타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수단을 총동원하는 두 사내에 관한 <포유동물들>(1962) 또한 흥미로운 단편들이다. 아마 이 두 단편의 주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은 <물 속의 칼>에서의 다음과 같은 대화일 것이다. “배에 남자가 둘이면 하나는 선장…”, “다른 하나는 선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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