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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지각변동 [5]
2003-01-10

얼어붙은 충무로, 금융자본 위축되고 돈가뭄 심각

코리아픽쳐스는 지난해 <굳세어라 금순아> <알리> 등이 흥행에 실패하고 외화인 <갱스 오브 뉴욕>과 <영웅>에 수년째 자금이 묶여 있어 3월까지 신규 투자를 동결하고 있는 상황이다. <고양이를 부탁해> <와니와 준하> <마리이야기> 등으로 손실을 본 아이픽처스도 “상황이 안 좋을 때 쉬어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차원에서 3년 동안의 펀드 운영을 ‘중간점검’하며 신규 투자처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다 비관적인 올해의 경기 전망, ‘CJS 연합설’ 등이 결합하면서, 여타 금융자본 역시 좀처럼 투자를 진행하지 않고 관망만 하는 입장이다. 한 투자사 간부는 “지난해 말 한국영화의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워낙 분위기가 얼어붙어 있다. 만약 올해 상반기에 300만 이상 영화가 3∼4편 정도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금융자본이 움직이지 않아 기획 중인 수많은 영화가 엎어지거나 제작이 무작정 연기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다른 투자사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순제작비 30억원이 넘는 프로젝트나 장르적 안정성이 없는 작품은 투자를 받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제작자들의 입에서는 “올 상반기는 엄동설한이 몰아칠 것이니 허리띠를 바짝 조이고 먹을 것을 비축해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올해의 자금난은 이미 지난해 중반부터 예견된 일이며, 장기화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한 제작사의 대표는 “수천만원이 없어서 시나리오 개발을 못하고 있다. 지금 당장보다는 1∼2년 뒤가 더 걱정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명필름의 이은 감독은 “기존 영화사는 그래도 작품 수를 줄이면 어떻게든 투자를 받을 수 있겠지만, 신생 영화사의 경우 펀딩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때문에 올해 싸이더스의 경우 다양한 제작비 절감 방안을 모색 중이며, 명필름은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여러 편의 작품을 개발하고, 이중 시장 상황에 맞을 만한 소수의 작품을 제작할 계획이다.

대박 터뜨려도 손해본다

이같은 자금난을 충무로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조정’ 기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최재원 아이픽처스 대표는 “현재 금융자본이 영화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제작사의 불투명성이다. 자금 사용처가 불명확하고 수익 정산도 잘 안 해주는 상황에서 어떻게 신뢰를 쌓을 수 있겠냐”고 말한다. 쇼박스의 김우택 상무는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면 투자자만 손해를 보고, 돈을 벌면 나눠갖는 구조다보니, ‘대박’을 터뜨려도 그동안의 손실을 메우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투자사들은 투자와 제작쪽의 수익배분 비율을 기존 5 대 5 또는 6 대 4에서 7 대 3 내지 8 대 2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말은 제작사의 투명성 확보와 수익배분 비율의 변동 등 투자자의 수익을 보장하는 수단이 만들어진다면 금융자본이 다시 투자에 뛰어들 것이라는 말로도 들린다.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2년 연속 40% 이상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관객은 존재한다. 소비는 건전하다는 이야기이므로 상황이 좋아지면 생산도 활발해질 것이다”라는 김승범 튜브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작사들은 구조조정이라는 문제에 원칙적으로 공감하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조종국 조우필름 대표는 “제작사도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는 원론적으로 찬성이다. 하지만 투자사 또한 제작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민환 나비픽처스 대표는 “웬만한 제작사의 경우 자체 펀딩이 어려운 탓에 손실까지 함께 부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한다. 또 7 대 3이나 8 대 2 같은 가혹한 조건의 계약은 성공에 대한 대가를 줄여 크리에이티브를 제한할 수 있으므로, 개봉시일에 따라 수익배분 비율을 바꿔나가는 방법 등을 모색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한편, 금융자본이 구조조정 국면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가운데, 조심스레 충무로를 넘보고 있는 세력도 있다. 롯데시네마 등 극장자본 외에 충무로 진입을 고려 중인 쪽으로는 우선 대기업을 꼽을 수 있다. 영상 관련 대기업들이 영화쪽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다양한 방향에서 들려온다. 특히 IMT2000 서비스 등에 쓰일 영상 콘텐츠를 확보해야 하는 일부 정보통신 관련 기업의 경우, 여러 채널을 통해 시장 진입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재원 대표는 “대기업의 참여 가능성은 충분히, 그리고 매우 긍정적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설명한다.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인터넷 기업이나 공중파 방송사, 외국계 자본들도 활발하게 충무로 인사들을 접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몇몇 대기업이 충무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는 결정을 내린다 해도, 이들이 명실상부한 새로운 자금원이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에는 이미 실패를 맛봤던 기업도 있고 금융자본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에 시장 진입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새로운 돈줄이 된다 해도 2001년과 지난해처럼 무분별한 투자가 이뤄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신중한 행보를 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대기업은 이미 충무로에서 쓴맛을 본 적이 있으므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최재원 대표는 설명한다.

"망한단 얘긴 매년 나왔지만..."

설사 금융자본이 침체 또는 철수하고 새로운 자본이 재깍 그 자리를 채우지 않는다 해도 한국영화가 일거에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영화계에 뛰어든 이래 ‘한국영화가 끝났다’는 얘기를 매년 들었다”는 이태원 태흥영화 사장의 뼈 있는 이야기를 상기한다면, 자금난으로 표출되고 있는 충무로의 위기는 불필요한 거품을 빼고 이전보다 촘촘하게 내실을 다지기 위한 진통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 물론 자금 압박으로 상당수 제작사가 어려움을 겪고 특정 장르의 영화만이 양산되며 특정 투자, 배급사 아래로 치열한 줄서기가 벌어질 우려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편수를 줄이고 작품에 더 심혈을 기울인다면 이전보다 자금을 구하는 게 더 쉬울 것이다”란 이은 감독의 말처럼, 지금 충무로의 자금난에서 전화위복의 기운을 찾는 지혜가 있다면 불안감은 기우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석 ssoo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