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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속 강행군,겨울 촬영현장 풍경 스케치 [3]
2003-01-18

<와일드 카드> 촬영현장

황혼에서 새벽까지 칼바람 뚫고 달린다

“춥죠?”“그러네.” “감기 들었어요” “응, 어제 방바닥을 너무 뜨겁게 하고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가지고.”(김유진 감독)

“춥죠?” “예, 감기 걸렸어요. 오늘은 좀 나은데 그저께 촬영 때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와서 혼났어요.”(배우 한채영)

명약관화하게 누가 봐도 추운데 춥냐고 묻는 건 썰렁한 일이다. 대한(大寒)이 놀러왔다가 얼어죽었다는 소한(小寒) 다음날인 1월7일의 서울 기온은 최저 -10도, 최고 0도였다.

몇 시간씩 야외촬영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훌륭한 인터뷰어가 할 질문이 아님을 알지만, 이번 특집기사의 공통된 첫 질문으로 정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조금 더 묻고 다녔더니 은근히 짜증섞인 반응도 나온다. 양동근은 “춥죠” 하고 물으니 “그런데요”라며 느리게 되묻는다. 억양없이 졸린 듯한 목소리, 좀처럼 눈을 맞추지 않고 취조당하는 피의자처럼 시선을 자기 신발께로 내리까는 표정이 <네 멋대로 해라>의 고복수다. 복수처럼 슬금슬금 사라진다.

이날 촬영은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강행군이다. 소한 전날인 5일, 기온이 -15도까지 내려가는 바람에 예정보다 앞당겨 밤 9시에 촬영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런 날엔 촬영하면 안 돼. 기본 세팅 해놓고 얼른 찍을 수 있는 것만 찍어야지, 대사 길고 분위기 잡아야 하는 장면은 찍어도 안 나와.” 김 감독에게 -10도의 이날은 그리 추운 날이 아니었다.

낮 촬영 장면은 형사 방제수(양동근)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 경찰 강나나(한채영)를 쫓아 지하철을 탔다가 소매치기를 만나 격투를 벌이는 부분. 서울 강북의 땅값 싼 곳만 이어달리는 지하철 6호선은 승객이 적어서 촬영에 적격이다. 스탭, 배우와 30여명의 엑스트라들이 차량 한칸을 ‘점거’했다. 소매치기들이 오른쪽 문으로 내리도록 동선을 잡고 예행연습까지 마쳤는데, 자꾸만 “다음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라는 방송이 나온다.

“이거 어디까지 가야 되는 거야” 서너 정거장 지나 김 감독이 답답해할 즈음에 ‘오른쪽’ 하차역이 연거푸 두번 나온다. 잇따라 두번을 찍고는 김 감독이 촬영감독에게 묻는다. “좋아” “예.” 큰소리로 외친다. “다음 역에서 내린다!” 시원시원하다. “중요한 장면은 몰라도 브릿지 장면은 빨리 가는 거지. 한번 찍고 말기는 서로 미안하니까 한번쯤 더 찍고.”

밤 8시, 강남구 청담동 경기고등학교 정문 앞. 방 형사가 고참 파트너 오영달(정진영) 형사와 순찰도는 장면을 레커차를 타고 찍는다. 칼바람과의 전쟁이다. 촬영팀은 마스크, 털모자, 방한점퍼에 핫팩을 2개씩 척추 부근에 부착하고 차에 올라탄다. 레커차에서도 장갑을 못 끼는 최악의 보직은 포커스를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촬영부 세컨드 오종현씨. “춥지만 이게 일인데요, 뭐. (손에 동상 안 걸리냐고 묻자)짬짬이 장갑을 끼니까 괜찮아요. 진짜 추운 건 동터오는 새벽이죠. 한기가 뼛속으로 오니까.”

<와일드 카드>는 강남서 강력반 형사들이 악질 퍽치기 일당을 잡는 이야기다. 내러티브는 경찰영화 장르에 충실하면서도, 일선 경찰의 애환에 방점을 찍는 휴먼드라마이다. “명쾌한 영화야. 액션도 간단명료하고. 진영이(정진영) 연기 많이 좋아졌어. 걔가 장고 끝에 악수하는 스타일이거든. 서울대 나온 애들이 다 그렇잖아. 자꾸 고민하기에, 네가 주인공인데 뭐가 고민이냐, 네 스타일대로 하라고 했지. 동근이(양동근)는 희한한 놈이야. 박자가 제멋대로인데, 하다보면 그게 절묘하게 맞아.”

기자재가 좋아져서 춥다고 말 안 듣는 게 없는데 딱 하나, 난로가 말썽이다. 경기고 앞길 한켠에 세운 임시 텐트 안의 부탄가스 난로가 화력이 시원치 않다. 김 감독은 난로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프로판가스하고 다르게 부탄가스는 너무 추우면 기화가 잘 안 돼.” 그러면서 가스통을 붙잡고 흔든다. 곧 불길이 확 피어오른다. 조금 있으니 다시 비실비실해진다. 틈틈이 가스통을 흔들며 말한다. “현장이 좋은 게 젊은 애들 봐봐. 얼마나 열심히 해. 추운 게 어딨어.” 임범 isman@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

슬레이트맨 이상원“손 시려운데, 장갑 끼지 말래요

촬영장에서 감독이나 조감독으로부터 “액션!” 소리가 떨어지면, 카메라 앞에서 “65에 1에 1” 하면서 숫자가 쓰여진 나무판을 ‘딱’ 치고 빠지는 이가 있다. 신과 컷, 테이크 수를 표기한, 작두처럼 생긴 이 슬레이트(일명 ‘딱딱이’)를 칠 때 나는 ‘딱’ 소리는 명료해야 한다. 녹음과 편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소리의 명료함을 위해, 추운 겨울 야외촬영장에서도 슬레이트맨은 장갑을 못 낀다. 자칫하면 판 사이에 장갑이 끼고, 그러면 편집기사에게 ‘박살’이 난다.

<와일드 카드>의 슬레이트맨은 이상원(22)씨. 네오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을 배우고 단편영화 촬영장을 쫓아다니다가, 아는 선배의 소개로 여기에 왔다. 보통 연출부 막내가 슬레이트를 치는 충무로 관례에 따라 그도 슬레이트를 들었다. 겨울 밤 촬영이 절반을 넘는 이 영화에서 제일 고생하는 건 그의 손이다. 장갑을 끼고도 소리가 잘 나게 칠 수 있을 텐데, 꼭 맨손으로 치는 건 자발적 결단이었을까. “장갑 끼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손이 제일 시리죠.”

처음엔 선배들에게 야단 많이 맞았다. 번호를 잘못 부르기도 했고, 슬레이트를 카메라에 너무 바짝 갖다대서 배우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촬영 절반이 지난 지금은 꽤나 능숙해졌단다. 가방에서 슬레이트를 꺼냈다가 집어넣는 솜씨가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다. 마른 체구에 추위를 많이 타게 생긴 이씨는 바지 속에 내복 입고, 위는 러닝셔츠에 내복에 스웨터에 조끼에 코트까지 다섯벌을 껴입고 있었다. 얘기 도중 계속 싱글싱글 웃는다. “아주 재밌어요. 사람들이 잘해줘요.”

사진설명

1. 스탭들이 영하 10도의 소한(小寒) 추위속에서 레커차에 올라탔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칼바람과 전쟁이다.

2. 변희성 촬영감독은 둥굴레차 한잔으로 몸을 녹여보지만 약효가 시원치 않다.

3. 레커차 위에서도 차 안에 앉은 정진영과 양동근에겐 레커차 촬영이 되레 따뜻하다.

4. 워낙 추워서 부탄가스 난로의 기화가 안돼 따뜻한 물로 가스통을 덥혀가며 불을 피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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