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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속 강행군,겨울 촬영현장 풍경 스케치 [2]
2003-01-18

<살인의 추억> 촬영현장

살인적인 빗줄기, 체감온도 영하 30도

“춥죠?”꼭 답을 듣겠다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애처로운 마음에 말이 절로 튀어나간 거다. 한겨울날 물벼락을 맞은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이 일제히 답한다. “… (덜덜덜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송강호가 예의 그 말투로 입을 연다. “아~ 머리가 막 쪼개지는 것 같애. 으~ 머리가 짧아서 그런가. 우후~ 장난이 아니야.”

1월8일 경남 사천의 한 철길 옆에 차려진 <살인의 추억> 촬영장에는 비가 내렸다. 기상청 레이더망에도 잡히지 않은 이날의 차디찬 겨울비는 살수차가 만들어낸 인공강우. 배우들은 이 비를 쫄딱 맞아가며 몇 시간째 연기를 하고 있다. 전날까지 영하 1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수은주가 다소 올라갔다곤 하나, 어둑하게 그늘진 곳에 자리잡은 촬영장은 최소 영하 5도권이니 찬물을 뒤집어쓰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불을 보듯, 아니 얼음을 보듯 뻔한 일이다. 김상경은 “한기가 뼛속 깊숙이 스며든다”고 말한다. 옷 안에 스쿠버다이빙할 때 쓰는 슈트를 입고, 그 안에 또 내복을 입었지만 두겹의 추위는 쉽게 살 속으로 파고든다. 이쯤 되면 ‘살수’(撒水)가 아니라 ‘殺水’라 할 만하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모델로 한 <살인의 추억>에는 유난히 빗속 장면이 많다. 영화 속 범인이 항상 비 오는 날 밤 범행을 저지르다보니 배우들은 밤중에 비를 맞으며 연기를 펼쳐야 했다. 그래도 지난해 12월에는 세트장에서 촬영해 잠시나마 추위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지만, 올해 들어 로케이션이 다시 진행되면서 고생막급이다. 특히 이날 촬영분은 형사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이 용의자 박현규(박해일)와 빗속에서 격투를 벌이는 클라이맥스 장면. 한껏 감정잡힌 연기가 필요하지만, 배우들 앞에 버티고 있는 장애물들이 만만치 않다. 추위와 비뿐만이 아니다. 철도청에서 1천만원에 하룻동안 대여한 기차가 수시로 지나가야 하는 탓에 안전에 신경써야 하고, 오후 5시면 컴컴해지는 짧은 일조시간과도 싸워야 하며, 비 오는 모습을 연출하니, 유난히 쨍한 햇빛도 차단해야 한다. 뭐 하나를 해결했다 싶으면 다른 장애물이 튀어나오는 식이니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몸을 적신 배우들은 초조하기 그지없다.

이날의 첫 촬영분량은 박해일이 다가오는 기차를 피해 철길 저편으로 도망치는 장면. 이미 이틀 동안 응달에 찬물을 뿌려댄 터라 땅은 빙판처럼 미끄럽다. 아니나 다를까, 수갑을 찬 채 연기하던 박해일이 중심을 잃고 터널 벽에 무릎을 부딪혔다.

결국 연출부와 제작부가 부탄가스에 노즐을 붙인 ‘토치’로 바닥을 녹이고 수건으로 일일이 닦는 작업을 한 뒤에야 송강호와 김상경이 기차를 피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사천에 오기 전 하루를 포함해 나흘째 빗속 장면을 찍고 있는 김상경에 비해 아직 몸에 물 한방울 적시지 않은 송강호쪽이 더 여유로운 분위기다. 후드득 하면서 비가 내리고, 송강호와 김상경이 용의자와 자신들 사이를 헤쳐 가르는 열차를 허탈하게 바라본다. “컷” 소리가 나자 김상경은 “거봐, 내가 뭐랬어” 하는 표정으로 송강호를 바라본다. 공사장에서 쓰인다는 ‘열풍 건조기’ 앞에서 몸을 말리던 송강호가 씩 웃으며 ‘첫경험’의 소회를 피력한다. “어제까지 남들 물 맞는 것을 볼 땐 별 느낌이 없었죠. 아니, 젊은 사람들이… 안에 슈트까지 입어놓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물을 맞아보니 도끼가 머리를 때리는 것 같네.”

두 번째 테이크를 찍은 뒤 감독의 오케이 사인을 기다리는데, 모니터를 보던 봉준호 감독이 벌떡 일어난다. 그는 배우들과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김형구 촬영감독과 대화를 나눈 뒤 한번 더 가자고 한다. 배우들에 대한 죄책감이 없냐고 묻자, 봉 감독은 “아, 나는 결국 지옥에 갈 거예요”라고 흐느낌조의 농담으로 답한다. 하지만 배우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외려 이젠 여유가 생긴 듯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든다. 송강호에 따르면 그만큼 감독을 믿기 때문에 그렇단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대한, 그리고 봉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배우들의 신뢰는 제3자의 상상을 넘어서는 모양이다. 이제 9부능선을 넘은 <살인의 추억> 촬영장이 ‘자뻑’의 산실이라는 소문도 거기서 비롯된 것 같다. 모니터를 보던 송강호가 봉 감독에게 한마디 한다. “야, 연기 죽이네. 이 표정하며….” 봉 감독이 받아친다. “야, 이거 봐요. 피가 진짜 흐르는 것 같네.” 스스로 도취하고 치켜세우는 가운데, 배우들은 허옇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 온몸의 한기를 실어 날려버리고 있었다.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비를 가장 많이 맞아야 하는 배우 김상경보드카도 그 추위 못 녹이네

“감기에 걸렸는지, 코가 멍멍하고 목소리가 잠기네요.” 김상경의 눈가에 피로가 보인다. 하루 6시간씩 나흘 연속 찬물에 몸을 노출하니 무쇠장사라도 견딜까. <생활의 발견> 때 찌운 14kg을 빼고도 더 빠졌다는 그의 홀쭉한 몸이 안쓰럽다. <살인의 추억>에서 서울서 파견온 형사 서태윤 역을 연기하고 있는 김상경은 영하의 날씨에 찬물을 맞는 느낌을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휘감은 뒤 온몸을 돌아다니는데, 악 소리 난다”고 표현한다. 비를 맞은 뒤 가쁜숨을 몰아쉬던 그가 허연 액체를 마신다. 이 액체는 서울서 긴급 공수된 보드카. 그는 “팔다리는 여전히 뻣뻣하지만, 뱃속에는 따뜻한 기운이 빙빙 돌아 그런 대로 괜찮다”고 설명한다. 그는 전날엔 양주를, 그 전날엔 이과두주를 마신 뒤 ‘음주연기’를 했다. “너무 추워서 그런지 하나도 안 취하는데요.” 동료배우 김뢰하가 구워준 삼겹살로 추위를 달래기도 했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렀건만, 그의 표정엔 근심이 어린다. “아, 저는 비맞는 장면이 몇개 더 있어요. 그중 하나는 강원도 홍성에서 찍는 거니깐….” 말하는 도중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사진설명

1. 컷사인이 나도 온풍기보다 모니터 앞으로 먼저 달려가 연기를 체크하는 배우들의 열정은 촬영장에 희뿌연 감동을 만들어낸다.

2. 모락모락. 촬영장에서 허연 김이 피어오른다. 젖고 얼어붙은 배우들의 몸에서 나오는 이 수증기엔 분명 진한 땀과 눈물도 베어 있을 터.

3. 여기 뒤질세라, 배우들의 안전을 위해 곱은손으로 얼음바닥을 녹이는 스탭들의 정성이나 자신의 촬영분량이 끝났는데도 촬영장에 남아 잔일을 돕는 배우 김뢰하의 동료애가 촬영장의 추위를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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