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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부 막내 박재영의 좌충우돌 시련기 [3]
2003-01-18

촬영장 시계는 돌아간다

1시. 장수로(장선우)와 순이(예지원) 배우 도착, 분장팀 분장 시작. 아침에 들렀던 마트에 다시 들러 종이컵 한 박스 사옴.2시. 티테이블에 담배 동남. 매점에서 담배 사온 뒤 티테이블 다시 정리. 굿당 세팅 완료. 배우분장 완료.

몇 가지 보충 장을 보고나니 다른 팀도 촬영준비를 마치고 촬영을 시작한다. 제작부 막내에게 제일 바쁜 시간은 한풀 지난 셈.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제작부 막내는 대기상태로 있다가 중간중간 세트 바꿔 끼는 걸 돕거나 스튜디오에 불을 켰다 꺼는 일 등을 빼면 ‘공식적으로’ 크게 할 일은 없다. 다른 스탭들과 모니터를 지켜보며 쉴 수도 있고 그러면서 배우랑 몇 마디 나눌 수도 있는 시간이 이때다. 하지만 돌발상황이 생겨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여기저기 다니다보면 촬영이 얼마만큼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기도 일쑤다.

대개의 제작부원들이 그렇듯 박재영씨의 꿈도 프로듀서다. 보통 제작부 막내 한두 작품 하고, 제작부장 한두 작품 하고 그리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 제작실장이 되고 그러다가 프로듀서가 되는 게 지금 충무로 도제 시스템에서 프로듀서가 되는 길. 박재영씨 역시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 제작부에 들어왔다. 하지만, 궁극적인 그의 목표는 ‘프로젝트팀’ 형태의 ‘제작팀’이다. “시스템을 바꾸기 보다는 뜻맞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그의 생각.

3시. 장선우와 예지원 출연하는 36신 촬영 중. 세트 벽 갈아끼움.

4시. 춘사관(양수리 종합촬영소 내 숙박시설) 숙박요금 지불.

“재영아~.” 세트팀이 부르는 한마디에 금세 목장갑을 끼고 세트 옮기는 걸 돕고, 또 일부 스탭이 이용하고 있는 춘사관의 숙박요금을 중간 결제하고, 물 끓이는 통에 새 물을 부어넣고. 밖에서는 슬슬 밥차 아저씨가 6시로 예정된 저녁밥 준비를 시작할 무렵 오후가 순탄하게 흘러갔다. 촬영이 진행되는 짬짬이 세트 뒤 어둠 속에서 그가 원래는 ‘연기’를 전공했다는 얘기를 불쑥 꺼냈다. 서울공고 1학년 때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이수하고는, 원래 미대를 가려 하다가 교회에서 연극 주인공을 한번 해보고는 연극영화과 연기전공으로 지망을 바꾸어 대학에 들어갔다고. 그런데 형이 만드는 학생단편에 프로듀서로 일을 해보니, 연기보다 그게 더 재미있어 다시 진로를 바꾸었다는 얘기.

6시. 저녁식사.7시. 세트 교체. 물통에 물 넣기. 8시 반. 춘사관에서 숙박할 배우들에게 지급할 음식 장봄.

36신 촬영이 끝나고 바로 저녁식사가 이어졌다. 이날 저녁은 밥차로 준비해서 식당 예약 등 특별히 제작부에서 할 일은 없었다. 여느 스탭들과 함께 줄을 서서 밥을 받아 박재영씨도 스튜디오 내 휴게실에서 저녁을 먹고 저녁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세트도 교체하고, ‘티테이블’도 새로 정비하고. 그런데, 누군가가 커피를 타면서 뜨거운 물 나오는 꼭지를 열어두었는지 스튜디오 한켠의 바닥이 물로 흥건해져 있었다. 대걸레를 가져다가 바닥을 닦고 새로 물을 채워넣을 수밖에. 이날은 배우들과 감독이 촬영소 내 춘사관에서 잘 계획이어서 미리 배우들과 감독에게 필요할 간식거리 등을 장봐다가 숙소에 갖다놓고 나니 날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10시20분. 촬영 완료. 청소.

순이(예지원) 없이 장수로(장선우) 혼자 나오는 짧은 68신 하나까지 오케이가 나고, 이날 촬영분이 모두 완료됐다. 조감독이 무전기에 대고 말하는 “수고하셨습니다” 소리에 서로들 인사를 할 때, 박재영씨는 말없이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시작한다. 스탭들은 하나둘씩 버스를 타러 스튜디오를 빠져나간다. 숙소로 돌아가 곧 잠자리에 들 그들과 달리, 아직도 박재영씨의 하루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 촬영분 필름을 서울의 현상소에 맡기는 중요한 임무가 남은 것이다. “서울에 가면 현상소 경비실에 필름을 맡기고, 어디서 잘지는 모르겠네요. 양수리에 와서 잘지, 아니면 그냥 신림동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올지….” 신림동 집에 가면 그는 옷장에서 오늘 낮에 가지러 갈 뻔했던 노란 의상을 발견해 가방에 챙겨넣을까. 혹은 양수리 모텔에 오면, 방을 같이 쓰는 다른 스탭들이 잠깰까봐 조심스레 늦은 잠자리에 들 것이다. 아침식사부터 한밤의 필름수송까지, <귀여워> 제작부 막내 박재영씨의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될 것이다.

한달 전쯤 박재영씨가 찍었다는 <귀여워>의 마지막 장면. 건달 뭐시기(정재영)에게 자장면을 갖다주고는 등까지 긁어주는 중국집 배달원 역은, <귀여워> 영화팀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비유 같다. 누구의 어떤 주문이든 신속정확하게 ‘배달’해주는 제작부 막내의 일은, 아플 정도로 발로 뛰며 말없이 영화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기에. “쓸쓸한 사람 위로하는 데는 등 긁어주는 게 최고니께”라는, 극중에서 정재영이 배달원에게 하는 대사는, 묵묵히 영화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귀여워> ‘다방 마담’이자 ‘배달원’ 제작부 막내 박재영에게는 정말로 듣고 팠던 말일 것이다. 영화내용과는 제일 무관하게, 카메라 가장 먼 곳에서 제일 바쁘게 일하는 제작부 막내. 그렇다고 누가 크게 알아주지도 않아 정작 영화팀 중 제일 ‘쓸쓸한’축에 낄 그가, 영화에서는 쓸쓸한 사람 시원하게 등 긁어주는 역을 맡았다는 게 아이로니컬하면서도 참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런데, 제작부 막내의 쓸쓸함은 누가 위로해주지 글 최수임 sooeem@hani.co.kr /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