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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부 막내 박재영의 좌충우돌 시련기 [2]
2003-01-18

촬영장 시계는 돌아간다

아침 7시. 양수리 숙소

냉기가 뼛속을 후비는 겨울, <귀여워> 영화팀이 묵고 있는 양수리의 ‘엘리제궁’ 모텔. 7시가 기상시간이라 했건만 모텔 안에는 누구 한명 일어난 기척이 없다. 그때, 카운터에 써붙여놓은 종이 한장이 눈에 들어온다. ‘11시에 전체 깨워주세요.’ 지난 밤 촬영이 지연된 모양이다. “귀여워 바로 한 시간 전까지 여기서 야식 먹고 술 먹다 갔어.” 기다리는 동안 아침을 먹으러 들어간 동네 어귀 식당 아주머니의 증언이 짐작을 굳혀준다. 터미널 근처 아침 일찍 유일하게 문을 연 다방에서 말 그대로 다방커피를 마시며 몇 시간을 보내고는 10시 반쯤 숙소로 다시 갔는데, 웬일인지 시간이 다 되어도 사람들이 별로 내려오지 않는다. 알고보니 모텔 아주머니가 주무시느라 ‘모닝콜’을 깜빡 한 것. 시계바늘이 11시를 넘은 지도 꽤 지난 뒤, 모텔 아주머니가 부스스한 채로 일어나 “11시가 넘었나 깨워주는 걸 깜빡 했네”며 서둘러 방마다 전화를 한다. 잠시 뒤 박재영씨가 모텔 1층에 있는 식당에 나타났다.

11시30분, 모텔 엘리제궁 1층 식당. 아침 겸 점심.

이미 식당에선 ‘모닝콜’ 없이 일어난 스탭들이 꽤 여럿 아침을 먹었거나 먹고 있는 참이었다. 박재영씨는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당황한다. 어젯밤 늦게 야식을 했기 때문에 아침은 식당에서 먹지 않고 바로 촬영소로 가서 거기서 밥차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지금 촬영소에는 밥차가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식당과 밥차가 겹친 것이다. “전날 밤에 술 먹은 날은 밥을 안 먹고 바로 촬영소 가서 스넥카에서 먹곤 했거든요. 그런데….” 식당은 식당대로 연락을 못 받고 50인분의 아침식사를 준비해놓고 이미 일부 ‘손님’을 받은 뒤. 사정을 말해보지만 영화팀용 식사는 일반 메뉴에 없는 ‘특별식’이라 일반인에게 낼 수 없다며 식당에서도 난색을 표한다. 일단 식당 아주머니에게 몇명이 밥을 먹었는지 물어봐 밥차에 연락을 하고, 식당쪽과 밥차쪽, 양쪽과 한참 이야기를 한다. 다행히 식당에는 변상을 따로 않고 밥차에도 재료비만 변상하는 선에서 문제는 해결됐지만, 잘못됐으면 한끼 밥값이 2배로 나갈 뻔했다. 제작부에게 중복비용 지출은 중죄다.

12시, 촬영소로 이동. 아침 장보기.

박재영씨는 항상 스탭이 타고 이동하는 버스보다 먼저 촬영소에 가서 스튜디오 문도 열어놓고 티테이블에 커피믹스며 녹차들도 세팅해 스탭들의 하루 출발을 맞는 ‘다방 마담’ 역으로 하루일을 시작한다. 이날은 아침 문제 때문에 출발이 늦었다. 마음이 급해서일까,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그만 다른 제작용 차량 한대를 살짝 박는 사고도 냈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커피며 음료수 등 “스탭복지”에 필요한 것들을 사 차에 싣고 종합촬영소를 향해 달리는데… 웬걸, 스탭들을 태운 버스가 더 앞에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도착했는데 문도 안 열려 있고 하면 기분이 안 좋잖아요.” 말하기가 무섭게 액셀러레이터를 밟더니 버스를 추월해버린다. 촬영소 입구에서 스튜디오 열쇠를 받아 막 문을 열려는데, 벌써 버스가 도착해 스탭들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섰다. 아직 티테이블도 못 차렸는데…. ‘귀여워 다방’ 주인은 문 열기도 전에 손님들이 밀어닥치는 문전성시()에 시달리고 만다.

12시30분. 스튜디오. 티테이블 세팅 완료 / 세트팀 ‘굿당’ 세팅 시작.

“근데 그게 꼭 그거여야 하나요” 겨우 ‘개시’를 했나 싶은데, 조금 볼멘소리의 박재영씨의 전화내용이 심상치 않다. 사정을 듣자 하니 의상팀에서 얼마 전 황학동 촬영시 박재영씨가 입었던 티셔츠를 개코 역의 박선우가 입는다는 통보를 해 왔다고. “제가 중국집 배달원 역으로 연기를 했거든요. 그때 입었던 노란색 티셔츠를 개코가 입어야 한다는데, 그 옷을 아직 반납을 안 해서… 어쩌면 서울 집에 갔다 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연출부 “승식이 형”과 조성민 제작부장이 박재영씨의 사연을 듣더니 차례로 의상팀 스탭에 전화를 해준다. 하지만 통화내용은 “꼭 그 옷을 입어야 하나”, 박재영씨가 했던 말과 같은 요지다. 똑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일까. 막내가 했을 땐 안 통하더니 제작부장의 입김이 미치자 그냥 다른 옷을 입히는 걸로 의상팀이 마음을 돌려준다. “안 가도 되네요.” 하마터면 티셔츠 하나 가지러 서울 갈 뻔했다.

박재영의 소지품

1. 무전기: 그의 무전기에서는 하루종일 쉴새없이 온갖 ‘주문’들이 전해온다.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스탭들의 말소리는 그에게 곧 지령이다. 피로에 지쳐 쓰려졌을 때도, 몇시간 만에 찾아온 담배 한대의 휴식이 끝나기도 전에 울리는 무전기는, 때로 악마같다.

2. 열쇠꾸러미: 스튜디오와 스튜디오 부속실의 열쇠가 줄줄이 매달린 열쇠꾸러미는 박재영의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이다. 누구보다 빨리 현장에 도착해 문을 열고 스탭들을 맞는 건 제작부 막내의 기본 중 기본. 그 열쇠들은 그의 시간을 감시하며 잠간 동안의 게으름마저 감금한다.

3. 돈: ‘현찰’을 빼고 제작부를 말할 수 있을까. 아침마다 10만원에서 20만원까지 그날 하루 쓸 돈이 든 봉투를 전대에 넣고 다니며 그는 하루동안의 현장 살림을 담당한다. 제작부 막내는 현장비용을 쓴 영수증을 모아 현장회계 담당 스탭의 정산 일도 돕는다. 돈을 누구보다 제일 많이 만지지만, 짐작대로 정작 자신은 “먹고 살 정도”와 무관한 보수를 받는다.

4. ‘병아리’ 사진 : 박재영의 ‘비밀 병기’는 바로 <귀여워>에서 ‘병아리’ 역으로 출연하는 아역배우 김희정 양의 사진이다. 웃옷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힘들 때마다 꺼내보고 웃는다. 전부 다 자기보다 ‘위’인 막내에게 꼬마 배우의 귀여운 웃음은 그에게 거의 유일한 진통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