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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평론가들이 바라본 한국영화 6편 [2]
2003-01-30

취화선

<카이에 뒤 시네마>가 본 <취화선>취한 붓은 서정을 휘두르고

임권택의 신작 <취화선>(불어 타이틀은 ‘여자에 취해 그림에 취해’이다)은 19세기 한국의 한 화가의 일대기이다. “중요한 것은 선들이 아니라 선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라는 대사는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의미는 관계와 몽타주에서 나온다. 한 장면이 이 관계의 중요성을 가름하게 한다. 여러 명의 화가들이 참여해 두루마리 그림을 완성하는 데서 오원은 그림을 시작하는 대단한 영광을 누린다. 그는 그의 스승을 제치게 되는데 이는 당시의 의례에 어긋나는 일이다. 오원은 싹트기 시작한 그의 명성에 의해 자신이 첫 번째 위치, 곧 주제를 점하는 위치에 오른다. 오원의 그림이 그렇듯 영화의 주요 관심은 아카데미에나 적합한 봉건적 후견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만약 오원이 역사에 속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역사가 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의 능력이 출중함에도 그것을 자랑하기보다는 작품을 통해서만 위대해질 것, 또 그의 그림 속에 반영되기를 원하는 사회의 요구에 응할 것.

회화를 스크린에 담는 일은 화면이 그림들과 구분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르게 하는 일이다. 임권택은 항상 취기에 이끌린듯한 형식에 의해 영화를 고전적인 엄격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단시간에, 오원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그의 예술이 모든 종류의 요구에 응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의 그림은 이제 정확한 과학에 접근한다. 영화는 1시간이 될 때까지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오원의 초반 작품들과 동일한 수준을 유지한다. 영화는 정확함과 아름다움을 펼쳐내고 권태로움을 거부한다. 또 주인공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거리를 두고 주인공을 따른다. 우리는 여기서 아카데미즘이 아닌 고전주의적인 어떤 형식을 보게 된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오원은 이와 다른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하고, 영화 역시 이를 따른다. 이제 더이상 작품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의 파기와 창작의 불가능함과 되풀이되는 혼돈이 영화의 중심이 된다. 취기와 여자들은 다시 그들 자리를 되찾는다.

불발로 그쳤지만 후세를 남기기 위한 매우 아름다운 섹스장면에서 이제까지 한켠으로 밀려 있던 관능성이 마침내 폭발한다. 오원은 막 사정을 하려는 순간에 여인의 품에서 떼어져나와 혁명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는 여인의 허벅지에 몇 방울의 정액을 남기는데, 이는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릴 때 화폭에 뿌려지는 얼룩들을 연상시킨다. 오원은 역사에 의해 ‘붓’에서 떼어져나온 것이다. 화가는 예술분야에도 영향을 끼친 혁명에 밀려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ㅡ 깨달음과 희생 그리고 재발견으로서의 혁명. 화가에게 세상의 유한성은 종이 끝의 가장자리에 의해 구체화된다. 그가 물감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을 그의 삶은 그에게 주기를 거부한다ㅡ 하나의 틀, 조화, 붙잡고 늘어질 그 무엇. 이 순간들에, <취화선>은 의례적인 무게감을 피하고 그것을 감정이 넘쳐 흐르는 서정시로 대체시킨다. 동시에 영화는 미학적인 논의에서 정치적인 우화로 변모한다.(<카이에 뒤 시네마> 2002년 11월 573호, SEBASTIEN BENEDICT)발췌, 정리 성지혜 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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