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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14]
문석 2003-02-06

˝늬들이 한국 영화사를 알아?˝

최초의 변사 우정식

무성영화 시절, “목소리를 가진” 변사는 스타 중의 스타였다. 행진곡에 맞춰 ‘모닝 코트’차림으로 등장한 변사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컨닝 램프가 부착된 무대 아래쪽 테이블에서 흥을 돋우었다. 최초의 변사로 기억되는 이는 우정식. 이보다 앞서 황실에서 활동사진을 설명하는 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직업적인 변사로 보기가 어렵다. 변사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때는 1912년 영화만을 전문으로 상영하는 경성고등연예관 개관을 전후해서라고 보는 것이 정설. 우정식은 이 무렵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악인의 볼따귀에 주먹을 날릴 때 “어드러 둥둥!” 하는 추임새는 그만의 특기였다고 한다. 이때 500여명 남짓한 관객도 함께 “어드러 둥둥!”을 외쳤다니 극장 안 열기는 뜨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 양반 출신인 그는 “말이 더디고 박력이 없어” 2권(卷)짜리 단편 활극에만 주로 기용됐다. 단성사의 서상호, 조선극장의 김조성, 우미관의 이병조 등 내로라 하는 경쟁자들이 들어선 시점에서 그는 더이상 ‘최초’의 빛나는 명예를 유지하지 못했다. 1920년대, 상영이 끝나면 변사를 모시러 온 기생들의 인력거가 극장 앞에 진을 치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서둘러 모셔가기 위해 인력거꾼들 사이에 몸싸움도 빈번했다. 당시 고급 관리 월급이 40원이었던 것에 비해 변사는 보통 70원씩 받았다. 개중 1급 변사는 150원이나 챙겼다. 특히 극장들이 인기 변사를 스카우트하려고 나서면서 이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하지만 이들의 영화(榮華)는 오래지 않았다. 유성영화의 도래가 결국 이들을 마약중독자로 내몰고, 길거리에서 횡사토록 만들었던 것이다.

최초의 활동사진 상영 1897년 10월 진고개

“좋은 구경 하시고 예쁜 기생 사진 카드도 받아가시오.” 광무 1년. 북촌 진고개(현 서울 충무로2가)에 자리한 중국인 소유의 어느 허름한 창고 앞에선 호객 행위가 한창이었다. 이날부터 3일 동안 프랑스 파테사(社)의 단편 상영을 시작으로 조선 땅에도 환영의 역사가 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괴이한 선전에 대해 호기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그건 10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2전을 줄 테니 제발 구경하고 가라”며 사정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던 것이 1909년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창고에서 ‘정기적인’ 상영을 시작하면서 활동사진에 대한 군중들의 환호가 터져나온다. 1927년에 상영됐던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의 경우, 상영료가 70전까지 오른 것을 보면 열기는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초창기 활동사진 상영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곳이 조선연초주식회사, 영미연초회사 등 담배를 만드는 외국 회사라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입장료 대신 빈 권련갑을 받기도 했다. 사회적 계급과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퍼졌던 담배처럼, 영화도 이때부터 군중을 휘어잡기 시작한다.

가장 좌석 수가 적은 극장(스크린 기준)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소재 시네마 오즈 3관으로 45석.

가장 좌석 수가 많은 극장(스크린 기준)

부산시 중구 남포동5가 소재 부산극장 1관으로 1183석.

최초의 소극장

1982년 9월28일, 서울시 신사동에 세워진 영동극장.

최초의 심야상영

1982년 3월27일 서울극장에서 상영된 <애마부인>.

모니터를 위한 최초의 일반시사

1983년 4월30일 명보극장에서 상영된 <그로잉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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