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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10]
문석 2003-02-06

˝늬들이 한국 영화사를 알아?˝

가장 많은 나라에서 촬영된 영화 <낮과 밤>(1984)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전세계 12개국, 21개 지역에서 촬영했다. “해외에서 국력 신장을 위해 땀흘리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다큐 기법을 동원해서” 만든 극영화로 이두용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매번 함께 움직여야 했던 인원만 대략 25명. 아무리 조심한다지만, 개인 짐은 물론이고 이동 때마다 각종 촬영 기자재가 제작진의 행선지와는 반대편의 나라로 운송되는 일이 빈번해 촬영일정이 지연되기도 했다. 숙식비는 물론이고, 비행기 티켓값을 아끼기 위해 이미 들렀던 곳을 경유해서 목적지에 가는 등의 수고도 치러야 했다고. 이두용 감독은 “이동시에 전세계 대부분의 항공기를 타면서 그 안에서도 촬영을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장면에 쓸 요량으로 KAL을 택했는데, 막상 비행기 뜨고 나서 찍으려고 하니 사전 허락없인 ‘불가’라고 했다. 그런 절차가 필요한 건 한국이 유일했다”고 돌이켰다.

할리우드영화로서 가장 많은 나라를 일주한 영화는 마이크 토드의 (1956). 세계 140곳을 돌며 찍었다는 이 작품은 물론 이름부터 그렇게 타고난 운명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촬영지를 돌아다닌 영화 <살인의 추억>

현재 제작 중인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전라도 일대와 강원도 등지 40여곳을 돌며 진행 중이다. 80년 중반 경기도 화성을 배경으로 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애초부터 국내 곳곳을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었다. 땅값 하락을 우려한 주민들이 이 영화를 찍는 것을 가만둘 리 없었고, 설사 주민의 협조가 있다 한들, 대규모 주택지로 변모한 이곳에서 80년대 분위기를 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때문에 제작부와 연출부는 거의 1년 가까이 시골 풍경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상대적으로 저개발 상태인 전라남북도 일대를 헌팅했다. 워낙 야외촬영이 많은데다 봉 감독의 깐깐한 성격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때문에 한 장면의 경우 영화에선 논 사이로 뛰어다닌 것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전남 남평에서 시작해 남원을 거쳐 전북 익산으로 돌아다니며 촬영해야 했다. 그나마 어렵사리 찾은 공간도 그새 개발돼 다른 곳을 물색해야 하기도 했다. 야외촬영은 전라남북도 40여곳을 돌아다닌 끝에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김지운 감독은 로케이션 장소를 빨간색으로 표시한 지도를 보고 “이게 농협 위치냐”고 묻기도 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제작비가 비싼 세트 <진시황제와 만리장성>과 <취화선>

가장 규모가 웅장했던 세트는 <진시황제와 만리장성>에서 사용된 만리장성 세트. 시흥과 안양 일대의 야산을 뒤덮었으니, 도전불허다. 가장 제작비가 비쌌던 세트는 <취화선>에 사용된 양수리 오픈세트다. 주병도씨의 지휘로 제작된 이 오픈세트는 건물 공사에만 11억원이 들었고, 소품에도 10억원 넘는 비용이 소요돼 모두 22억원이 들었다. 이 세트는 어찌나 꼼꼼한지, 촬영이 끝난 지금도 집주인이 문을 열고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세트는 등에서 ‘재활용’하기도 했다. 한편, 임권택 감독은 세트 제작에서도 진기록을 거듭 수립해왔는데, 90년 <장군의 아들> 때는 4억5천만원짜리 세트를 지었고, <춘향뎐> 때도 10억원 가까운 비용을 들여 남원에 세트를 지었다.

영화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세트는 사무엘 브론스톤의 <로마 제국의 멸망>(1964)에서 재현된 로마 포럼. 베니에로 콜로산티와 존 무어가 디자인했으며,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의 라스 마타스, 55에이커 대지에 17만개의 시멘트 벽돌을 쌓고, 601개의 기둥과 350개의 동상, 27개의 실물 크기 건물 등을 짓기 위해 100여명의 인력이 62년 10월부터 꼬박 7개월간 매달렸다.

가장 짧은 이동 속에서 촬영한 영화

정종화씨에 따르면, 최근작으로서는 윤정희, 장동휘, 김형일 주연, 엄종선 감독의 <만무방>(1994)이다. 6·25 전쟁 말기 한 초가집을 배경으로 윤정희를 차지하기 위한 이념 다른 남성들의 쟁투를 그린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집 세트 하나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지 ‘아이디어’를 잘 살린 데 그치지 않고, 그해 <시카고 트리뷴>에서 꼽은 세계영화 10위 안에 꼽히는 등 평론적으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최초의 올로케이션영화

1949년 최인규 감독의 <파시>. 전 스탭과 배우들이 1개월 동안 흑산도에 체류하면서 전편을 촬영했다.

최초로 해외에서 로케이션한 영화

굳이 원조를 따지자면 나운규의 <사랑을 찾아서>(1928)를 꼽을 수 있다. 혹한기 만주 벌판에서 촬영을 하느라 카메라가 얼어붙었다는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해방 이후로는 홍성기 감독의 1959년작 <길은 멀어도>다. 센강변의 정취를 찍기 위해 김지미와 김동원 등이 파리로 나갔다. 스탭과 배우들은 중간에 일본에서 머물며 <유정>을 찍기도 했는데, “한번 나간 김에 두편은 찍어야겠다”는 홍성기 감독의 욕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유정> 프로젝트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극영화로는 롱펠로의 시에 등장하는 아메리카의 인디언 영웅 하이어워사를 다룬 영화 <하이어워사>(1905). 영국 감독 조 로젠탈이 캐나다 온타리오의 데스바라츠에서 촬영했다.

가장 많이 촬영이 이뤄진 장소

정종화씨는 단연 비원을 꼽는다. 정창화 감독의 <장희빈>(1960) 등 1950~60년대 궁중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모두 비원에서 촬영됐다. 충무로에서 가깝고, 뒷배경으로 야산이 걸리며, 관리소에 얼마 정도를 지불하면 촬영협조를 해주는 등 여건이 좋았기 때문. 관리소 입장에서는 김지미, 엄앵란, 조미령을 보러 들어오는 관람객 덕분에 입장수입도 짭짤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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