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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6]
문석 2003-02-06

˝늬들이 한국 영화사를 알아?˝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검열

80년 동안 가위질은 쉬지 않고 계속됐다. ‘오버’ 제스처의 극단이었던 검열의 연속. 이중엔 기가 찬 사례 또한 많았다. 일제는 이규설의 <농중조>(1926) 중 “노출이 심하다며” 가위를 들이댔다. 화숙 역을 맡았던 복혜숙의 ‘종아리’가 드러났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방을 맞았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4·19와 함께 민간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들어선 것도 잠깐. 군화 신은 독재자들은 검열을 진두지휘했다.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1965)에 용공혐의를 걸어 감독인 이만희를 구속하기까지 했다. 극중 자신들을 겁탈하려는 중공군을 쏘아죽인 인민군 장교를 두고 남쪽의 여포로들이 “멋있다”는 대사를 읊은 것이 꼬투리였다. 오죽했으면 감독이 재판정에서 김일성에게 영화를 보여준 뒤 그의 반응에 따라 용공 여부를 결정하자고 했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두 여보>(1970)는 “한 여인이 두 남편을 거느리는 것이 사회정서상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문제의 여인을 결말에서 죽이라”는 시나리오 개작 명령을 받았다.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두 남편을 ‘섬겨야 했던’ 영화 속 그녀는 그렇게 죽어갔다. 하이틴 로맨스영화라고 검열의 눈초리가 누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미안해>(1976)는 ‘잘 노는’ 주인공들이 “면학분위기를 해치고 청소년들의 탈선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작품 전체가 반려됐다. <정부>(1982)의 경우, ‘情婦’라는 제목을 ‘貞婦’로 개작하라고 했는데, 이 결과 “정숙하기 그지없는 여인이 부정을 저지르고 다니는” 이상한 꼴이 되고 말았다. <애마부인>(1982)의 ’마’자가 원래 ‘馬’였다가 “변태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麻’로 바뀐 건 유명한 사실. 검열이 오히려 관객의 ‘음란한 상상’을 부추기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조금환 감독의 <있잖아요 비밀이에요>(1990) 중 “너도 요새 멘스하니”“응. 나도 그거 해”라는 하희라와 친구의 대사에서 ‘멘스’라는 부분을 제거했으나, ‘머리 큰’ 관객 대부분은 그 자리에 ‘섹스’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해석했다. <갈마>(1991)에서 갓 출산한 아이의 몸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흉측하다”며 잘려나간 것도 검열기구의 이해 못할 처사다. 검열이 유지되는 동안 한국영화는 이해 못할 실험영화의 산실이 됐다.

영화에 대한 검열을 세계 최초로 법제화한 것은 시카고의 주의회. 1907년 11월, '외설적이고 부도덕한 영화의 상영을 금한다'는 법령이 발표되자, 시카고에서 공개 상영을 원하는 영화는 경찰의 심의를 거쳐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 검열 최초의 어이없는 희생자는 1908년작 <맥베스>. '셰익스피어는 예술인데, 이 5센트(당시 입장료)의 예술로 다 각색될 수 없다'는 한 경찰 간부의 고집으로 상영 금지됐다. 그의 말인즉슨, "희곡에서는 칼로 찌르는 신이 두드러지지 않는데, 영화에서는 그게 주안점인 것처럼 보여준다"는 것.

사상 최악의 검열작 <혈마>

1928년 고려영화제작소 아래서 홍개명 감독이 만든 <혈마>(血魔). 이 영화는 7천척으로 완성됐으나 검열과정에서 반동강이 나 3500척으로 줄어들었다. 경상북도 어느 부호 가문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이 영화는 근친상간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룬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 검열당국은 절반이나 자르며 뭐가 뭔지도 모르게 해놓고도 미진하다고 판단했던지, 끝내 상영금지 조치를 내렸다. 최근작으로는 김수용 감독의 <야행>(1977)으로 53군데를 잘렸다. 거의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한 것. 김수용 감독은 이후 <중광의 허튼소리>(1986)의 14군데가 삭제된 데 격분해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훗날 영상물등급위원장 자격으로 <죽어도 좋아> 사태 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가장 많은 컷의 가위질을 요구당한 영화는, 미국에서 MPAA로부터 R등급을 받기 위해 무려 150컷을 들어내라는 말을 들었던 <올리버 스톤의 킬러>(1994). 오죽 심했으면 영국에서는 검열 담당 간부가 스톤에게, 지나치게 설명되지 않는 살인의 불쾌함을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몇몇 폭력신을 복구해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다.

Record Maker#3: 신성일 가장 많은 작품에서 주연한 배우(536편), 한해에 가장 많은 영화에 주연한 배우(45편, 1968년), 가장 많은 여자배우를 상대한 남자배우(104명)

한국영화 80여년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다. 신필림의 오디션에 합격한 뒤 강신영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뉴페이스 넘버원’이란 뜻의 신성일로 다시 태어난 그의 출발은 짐작과 달리 초라했다. 평소엔 사무실에서 전화수 역할이나 복사일 등을 했고, 영화에 출연한다 해도 단역만을 전전했다. 이강천 감독의 <사랑의 역사>에선 육체파 배우 김혜정의 ‘몸받이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가 1957년 <로맨스 빠빠>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전화를 잘 받아서였다. 평소 전화 심부름을 하던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눴던 작가 김희창의 추천 덕에 이 햇병아리 배우는 김승호, 주증녀, 김진규, 최은희, 남궁원, 도금봉, 엄앵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이후 흥행과 비평에서 대성공을 거둔 유현목 감독의 62년작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각종 상을 받은 신성일은 드디어 스타덤에 오른다. 63년만 해도 <가정교실> 등 10여편에 출연했을 뿐인 그는 64, 65년에는 30여편씩 출연하더니 66년에는 40편대를 돌파하고, 67년에는 50여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주연작의 개봉 기준으로 볼 때, 1968년은 최절정의 해였다. 신성일은 이 해에 개봉된 212편 중 20%가 넘는 45편에 주연이었다. 자연 납세순위에서도 두각을 발휘했다. 66년엔 195만원(총소득 645만원) 납부로 연예인 1위를 차지했고, 67년에도 총소득 965만원 중 339여만원의 세금을 내며 이 자리를 지켰다. 신성일에 따르면 1967년 65편에 출연했는데, 하루 18편에 겹치기 출연한 적도 있었다고 하니, 홍길동이나 손오공도 흉내낼 수 없을 ‘둔갑술’을 보여준 셈이다. 잡지에서는 “신성일의 아성은 언제 무너질 것인가”라는 기획기사가 다뤄지기도 했다. 그가 그토록 많은 영화에 나온 것은 당시 영화의 큰 돈줄이었던 지방 흥행업자들이 그를 강력히 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가 주연하지 못하면 이름이라도 포스터에 넣게 해달라고 생떼를 부리기도 했다. 그를 짝사랑한 것은 흥행사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제주도의 한 관광호텔에 묵었을 때, 창 맞은편에 자리한 여고에서 수업이 안 된다며 교감이 방으로 찾아오기까지 했을 정도로 그는 모든 여성의 우상이었다. 당연 남성들, 그중에도 젊은 남성의 질투는 심했다. 서울대 문리대학생회가 그에게 ‘최악우상’을 수여한 것도 어쩌면 이런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부인 엄앵란은 ‘상을 받는다’는 소식에 수상식장에 왔다가 난망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아무튼 가장 최근작인 <아찌아빠>(1995)까지 신성일이 출연한 작품은 모두 536편. 그중 주연작은 495편이었다. 상대한 여자배우는 104명이었다.

외화의 경우, 최다 주연의 주인공은 인도의 여성 코미디언 마노라마. 1958년에 데뷔한 이래 30편을 동시에 찍곤 했다는 그녀는 1985년에 이미 1천 번째 영화를 선보인 바 있다. 할리우드 스타 중에서는 존 웨인이 153편의 출연작 가운데 11편을 제외한 전작에서 주연을 맡은 기록을 갖고 있다.

Record Maker # 2: 심훈 최초의 ‘대타’ 연기자. 최초의 감독 출신 소설가.

<상록수>의 작가로 알려진 심훈은 애초 영화인이었다. 1923년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시와 소설을 썼던 그는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하면서 영화와 연을 맺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이밀게 된 것은 어처구니없는 사건 때문이었다. 1926년 이경손 감독이 <장한몽>을 절반 정도 촬영하던 도중, 이수일 역을 맡고 있던 주경손이 행방불명된 것. 혹설에는 이경손 감독과 라이벌 관계이던 나운규가 그를 꼬여냈다고도 하는데, 어찌 됐건 갑갑해진 이 감독은 평소 알고 지내던 심훈을 대타로 투입하게 된다. 결국 관객은 영화 중간 갑자기 이수일이 바뀌는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되지만, 워낙 아량들이 넓어서였는지 흥행은 썩 잘된 편이었다. 이후 영화에 완전히 ‘꽂힌’ 심훈은 일본 닛카쓰스튜디오에서 수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돌아와 자신의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제작한다. 심훈 자신이 원작을 쓰고, 각본을 썼으며 연출한 이 작품에서 그는 이동촬영 등 일본에서 배워온 갖가지 기량을 뽐냈다. 재밌는 일은 <먼동이 틀 때>를 찍을 때도 ‘대타’를 투입해야 할 상황을 맞이할 뻔 했다는 점. 주연 강홍식은 촬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돌연 자취를 감췄다. 난감해하던 심훈은 수소문 끝에 “일본 창녀와 단꿈을 꾸고 있”(안종화, <조선영화측면비사>)던 강홍식을 붙들어 영화를 마쳤다. 이후 그는 1930년 <동방의 애인>, 1931년 <불사조>(不死鳥), 1933년 <영원의 미소>, 1934년 <직녀성> 등을 신문에 연재했고, 1935년에는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에 당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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