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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5]
문석 2003-02-06

˝늬들이 한국 영화사를 알아?˝

최초의 키스신 <운명의 손>(1954)

‘혁명’이었다. 이전까지 러브신이라 해봤자 하염없이 바라보다 덥석 두손을 마주 잡거나 와락 껴안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외국 배우들이야 ‘필’만 꽂히면 입술을 부벼댔지만서도, 이를 본 관객이 금발의 연인들을 제몸처럼 여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운명의 손>이 건드린 표현 금단의 영역은, 그래서 ‘조선’ 관객에겐 달콤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5초가량 슬쩍 입을 맞댄 것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한형모 감독의 ‘결단’이 뜻대로 진행되기 위해선 거추장스러운 몇 가지 의례가 요구됐다. 일단 카바레 마담 정애 역의 윤인자와 국군 대위 영철 역의 이향의 키스 도중 ‘부적절한’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차단해야 했다. 두 사람의 입술에 셀룰로이드 재질의 비닐(담뱃갑의 비닐을 활용했다는 설이 있다)을 입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질병 전염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일석이조. 이와 관련해 사회적으로 질병예방 체계가 허술했던 전쟁 직후의 상황에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책이라는 분석도 있다. 처음 시도하는 키스이니만큼 당시 제작진은 만반의 준비를 기했는데, 윤인자의 남편을 세트로 데려와 그의 입회하에 촬영을 진행한 것도 그중 하나다(방송작가였던 남편이 고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아래 에피소드와 뒤섞여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회적인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개봉 이전에는 기본적인 설정 이외에 영화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등 비밀 마케팅으로 일관했다. 효력은 상당했다. 12월14일, 서울 스카라극장의 전신이었던 수도극장에서 개봉해서 5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영화들이 키스장면을 끼워넣는 것은 보지 않아도 당연한 일. 하지만 잡음도 없지 않았다. 첫 번째 키스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이향은 <인생역마차>(1956) 촬영 도중 노경희와의 키스장면이 신문광고에 버젓이 등장하는 바람에 몸을 사려야 했다. 노경희의 남편이자 배우였던 전택이가 주머니 칼을 소지하고 그를 찾아 충무로를 헤맸기 때문. 결국 감독이었던 김성민이 살벌한 협상테이블을 중재한 뒤에야 촬영이 재개될 수 있었다 한다. 이러했으니 여배우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강대진 감독은 <외나무 다리>(1962)를 두고, “주연배우였던 김지미와 최무룡이 당시 열애 중이라 실감나는 장면을 뽑아낼 수 있었다”며 회고하기도 했다.

스크린 사상 최초의 키스신로 기록된 장면은 1896년 연극 <미망인 존스>에서 필름으로 찍은 메이 어윈과 존 라이스의 입맞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이 장면은, 당대의 저널 <더 채프 북>에서 "절대적으로 역겹다"는 평을 듣기도.

최초의 누드 <전후파>(1957)의 윤인자

호스티스 역을 맡은 윤인자의 목욕장면. 1950년대 윤인자는 국내 여배우 중엔 광범위한 팬을 확보하고 있던 마릴린 먼로의 독주에 제동을 걸 만한 이로 손꼽혔다. 같은 해에 선보인 <그 여자의 일생>(1957)에서도 윤인자의 샤워장면을 볼 수 있는데, 실제 이 장면 촬영시엔 두 번째 남편이었던 고설봉씨와의 협의 끝에 감독과 촬영, 조명감독만 입장이 가능하도록 세트장 출입을 통제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라고 그녀를 훔쳐볼 순 없었다. 큰 수건으로 맨몸을 둘둘 말았기 때문이다. 한때 세속의 때를 벗기 위해 출가하기도 했던 윤인자는 83년 환속한 뒤 연기를 계속했다. 쉽사리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에서 노스님을 눈여겨볼 것. 이에 비해 김승호는 “옷 입고 목욕하는 것 봤느냐”며 홀라당 벗고 연기에 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겨울 오픈세트에서도 그의 주장은 굽힘이 없어, 처음엔 얼굴 보러 왔던 아낙들이 그의 거침없는 탈의에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는 일화가 여러 편 있다.

영화가 기억하는 최초의 여주인공 누드는 조지 포스터 플랫이 연출한 <인스퍼레이션>(1915)의 오드리 먼슨의 나신. 조각가의 모델이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지는 순진한 시골 아가씨의 벗은 몸은, 당시 미국사회에서 충분히 도발적인 시도였다. 남성의 누드는 1912년 이탈리아영화 <단테의 인페르노>에서 잠깐 스쳐가지만, 상업영화에서 성기를 노출한 것은 켄 러셀의 <위민 인 러브>(1969)에서 올리버 리드와 앨런 베이츠가 옷을 벗고 레슬링 시합을 벌인 이후라고.

최초의 동성애영화 <시발점>

동성애의 기준을 어디에 놓을 것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표현 수위나 노출 수위 등을 고려할 때, 최초로 동성애를 전면에 다룬 한국영화는 김수용 감독의 <시발점>(1969)이라 할 수 있다.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2차대전 패망 뒤 만주를 배경으로 일본군에 속했던 일본인 하사관과 조선인 지원병의 이야기를 그린다. 추위를 이기지 못해 부둥켜 끌어안는 등 ‘동성애적 묘사’를 포함하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해 검열당국은 못 마땅했지만, 제목을 <병신과 머저리>에서 <시발점>으로 바꾸는 정도의 제재만을 가했다. 여성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최초의 영화는 <산딸기> 시리즈의 김수형 감독이 76년에 만든 <금욕>이다. 세 남자에게 강간당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패션모델 영희와 부유한 이혼녀이자 화가 노미애 사이에서 싹트는 연대와 연민을 다루는 이 영화의 표현 수위는 당대로선 파격적이다. 미애는 영희의 알몸에 바디 페인팅을 하거나 벌꿀로 전신마사지를 해주기도 하고, 벌거벗은 등에 바퀴벌레를 풀어놓기도 하는 등 우회적인 방법으로 육체적 접촉을 암시했다. 영화의 결말은 영희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쪽으로 귀결되지만, 동성애 잡지 <버디>가 이 영화를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영화”로 꼽은 것은 “레즈비언이란 여자와 성교하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인생의 가치 중심을 여자에게 둘 수 있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다. 최초로 ‘동성애영화’를 표방한 한국영화는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1995)이다. 한국 현대사의 상흔으로서 동성애를 묘사했던 이 영화는 ‘진정한 동성애영화’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시켰지만, 중년의 동성애를 다루는 등 과감한 표현으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외화를 통틀어 살피면, 독일산인 리하르트 오스발트의 1919년작 <남들과 다른>(Anders als die Andern)이 남성간의 동성애를 다룬 최초의 영화로 기억된다. 프러시아의 위압적인 기숙학교에서 교사에게 매혹되는 소녀의 이야기로 여성간의 동성애를 다룬 레온티네 사간의 1931년작 <제복을 입은 소녀>(Ma(움라우트 찍어주세요)dchen in Uniform) 역시 독일영화. 일본과 영국 등 기타 국가에서 동성애영화가 나오는 것은 194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최초의 엉덩이 노출 남자배우 구봉서

정종화씨에 따르면,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의 구봉서. 화장실에서 일보는 장면에서 엉덩이가 보였다고. 코미디언이라 심한 제재나 격한 논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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