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스크린 진기록 대행진 [1]
이다혜 2003-02-06

˝늬들이 한국 영화사를 알아?˝

한국영화 기네스북, 신기록 진기록 열전

1919년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탄생한 이래, 80몇년 동안 한국영화가 남긴 기록을 들춰보는 일은 엉뚱하다. 영화 자체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매체라곤 하나, 스포츠가 아닌 이상 기록을 위해 만들지는 않을 터. 신성일이 ‘최다 작품 출연’ 기록을 세우기 위해 숨을 참아가며 536편의 영화에 출연했을 리 없고, 109편의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이 ‘최다 작품 연출’ 부문 메달을 따기 위해 고영남 감독과 임권택 감독을 상대로 ‘할리우드 액션’을 펼쳤을 리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영화의 진기록들은 영화의 본질과는 거의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리 한국영화의 갖가지 기록이 예술이나 장사와 무관하다 되뇐다 해도 그리로 눈길이 쏠리는 것마저 막을 순 없다. 크고, 길고, 많고, 강한, 그리고 오래된 것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관심을 끌어당기지 않는가. 여기 소개되는 기상천외 신통방통 황당무계 기록들 또한 어떤 이에게는 추억을, 어떤 이에게는 흥미를 던져줄지 모른다. 그리고 가끔은, 아주 가끔은 기록과 기록 사이에서 잠깐씩 스쳐가는 영화인들의 지난한 고투나 순수한 열정 또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사족. 이번에 게재하는 한국영화 진기록은 완전한 형태라 말할 수 없다. 짧은 준비기간과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부실하기 짝이 없다. 진정한 기록은 아직도 진흙 속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 때문에 <씨네21>은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기록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또한, 이 기사에 사용된 기록 중 상당수는 ‘걸어다니는 영화사전’ 정종화씨의 도움 덕분에 싣게 됐음을 밝힌다. 60년대 영화사와 영화잡지에서 활약한 이래 각종 영화 포스터, 전단, 보도자료, 기사 등을 꼼꼼히 수집하고 분류해온 정씨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기록들은 정리될 수 없었을 것이다. - 편집자글 문석 ssoony@hani.co.kr, 황혜림 blauex@hani.co.kr이영진 anti@hani.co.kr 자료 사진제공 정종화

참고자료 <한국영화총서>(영화진흥조합), <한국영화자료편람>(영화진흥공사), <한국영화측면비사>(안종화, 현대미학사), <자료로 본 한국영화사1, 2>(정종화, 열화당), <한국영화 100년>(김종원, 정중헌, 현암사), <근대의 풍경>(차순하 외, 소도), <씨네21> 회고록, <Film Facts>(Patrick Robertson, Billboard Books)

최초의 영화기자 비리 사건 찬영회(讚映會) 습격사건

1931년 찬영회(讚映會) 습격사건이란 게 있었다. 찬영회는 1929년 평론을 통해 영화와 관객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목적으로 신문사 학예부(문화부) 기자들이 만든 단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조직이다보니 영화인들은 영화가 만들어지면 찬영회 기자들을 초대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당시 일류 요릿집인 명월관 등에서 벌어진 이 자리에서 기자들은 기생을 옆구리에 끼고 놀다가 여배우를 불러내 농지거리와 욕설을 퍼붓곤 했다. 일부 기자는 외화 수입에 가담해 수익을 보기도 했고 시사회를 열면 영화사에 과중한 부담을 지우기도 했다. 이러한 기자들의 안하무인격 작태는 영화인들의 공분을 모으고 있었고, 마침내 1931년 12월31일 분노가 폭발한다. 이날 밤 망년회를 갖던 영화인들은 찬영회에 대한 성토를 벌이다 “찬영회 타도”를 외치며 뛰쳐나가 신문사를 돌며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고, 파손시켰으며 일부 회원 집을 찾아가 몰매를 때리기도 했다. 이에 경찰은 ‘영화인 폭동사건’이라는 죄목을 내걸고 영화인들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고, 영화인들은 경찰서에 자수하기 전 당시 찬영회 회장 심훈 등을 만나 ‘당신들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카드를 내밀며 찬영회 해체와 해명기사 게재를 약속받는다. 구속됐던 영화인들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흐지부지 석방된다. 당시 영화인 그룹의 리더격인 윤봉춘은 훗날 “우리나라 사람끼리 그런 분쟁이 일어난 재미없는 일이었지만 영화인들끼리 단결된 짓을 봐서는 훌륭했다”고 회고했다. 한편 찬영회 사건의 발단에 관해 안종화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애초 이날의 망년회는 좌파 성향의 영화인들이 일본인 영화에 출연했던 나운규를 규탄하기 위해 열렸는데,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챈 나운규가 “봉변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의 지략”으로 찬영회를 걸고넘어졌고, 결국 찬영회 습격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정이야 어쨌건, 찬영회 습격사건은 요즘도 간간이 불거지는 영화기자 비리 사건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제목이 가장 긴 영화와 가장 짧은 영화 <대학로에서…>와 <폰> 등 33편

남기웅 감독의 디지털영화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2000)가 가장 긴 제목의 영화. 모두 27개 글자로 이뤄졌다. 2위는 장년층들의 이름 외우기 놀잇감이었던 김영효 감독의 1974년작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다. 24자. 3위는 이무영 감독의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2002)로 20자. 공동 4위는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강우석 감독), <따봉수사대-밥풀떼기 형사와 전봇대 형사>(1991, 신우철 감독), <내가 성에 관해 알고 있는 몇가지 이야기들>(1933, 양태화 감독)이었다. 한편 제목이 가장 짧은 영화는 <돈>(1958), <흙>(1960), <딸>(1960), <쌀>(1963), <>(1967), <꿈>(1967), <산>(1967), <>(1971), <애>(1971), <왜>(1971), <>(1977), <>(1978), <요>(1979), <형>(1984), <>(1985), <>(1985), <단>(1986), <덫>(1987), <업>(1988), <떡>(1988), <>(1988), <꿈>(1990), <무>(1990), <>(1991), <>(1995), <>(1996), <>(1998), <>(1998), <>(1998), <섬>(1999), <> (1999), <폰>(2002), (2002) 등이다.

외화로 제목이 가장 긴 축에 속하는 영화는 <Night of the Day of the Dawn of the Son of the Bride of the Return of the Revenge of the Terror of the Attack of the Evil, Mutant, Hellbound, Zombified, Flesh-Eating, Sub-Humanoid Living Dead-Part 4>(1993). 도무지 해석할 엄두가 나지 않는 제목은 이 외에도 많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할 밖에. 가장 짧은 제목은 98년작 <파이(원주율 기호로 고쳐 주세요)>를 비롯해 <A>(1964), <B>(1969) 등 알파벳 문자 다수다.

상영시간이 가장 긴 상업영화 <폭군연산>

단순히 숫자에 매달린다면 정진우 감독의 1991년작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일 것이다. 무려 400분에 달하는 이 영화는 1, 2부로 나뉘어 200분씩 상영됐다. 그러니까 이 한편을 보려면 6시간하고도 40분을 극장에서 버텨야 한다는 얘기. 하지만 정종화씨는 “이 작품은 애초 홍성유 원작의 <비극은 없다>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이었는데, 중도에 제작비에 차질이 생겨 KBS와 납품계약을 맺고 7등분해 만들었기 때문에, 본격 영화라기보다는 TV용 영화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정종화씨는 대신 신상옥 감독의 1962년작 <폭군연산>을 꼽는다. 1962년 신정에 개봉한 <연산군>은 146분짜리.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훌륭하자, 신필림은 그해 설에는 이전에 촬영했던 장면을 덧붙여 <폭군연산>을 발표한다. 3시간26분짜리 영화가 출현한 것으로, 아직 이를 넘어선 작품은 없다.

60~70년대 뮌헨의 삶을 다룬 독일 감독 에드거 라이츠의 1992년작 <제 2의 고향>(Der Zweite Heimat)의 상영시간은 25시간 32분으로 세계 최장. 상업영화로 온전히 상영됐다는 전제 하에서는 이 작품이 가장 길지만, 길이만 따지면 무려 85시간에 달하는 존 헨리 팀미스 4세의 <불면증을 위한 치료법>이 챔피언감이다. 하지만 시인이자 배우인 주인공이 4080페이지에 이르는 동명 자작시를 읽는 장면이 대부분이라는 이 영화가 결코 상업영화가 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