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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감독` 타이틀 얻은 곽재용 감독의 어제와 오늘 [1]

신세기 멜로로 귀환한 ’소나기’ 동화가

분명 예외적인 일이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떤 계기로 성공을 하고나면,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그 사람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행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만약 그 사람이 오랜 기간의 ‘공백기’를 거쳤거나, 지극히 입지전적인 인물일 경우, 그 행사에 동석하지 못해 조급해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반가움과 궁금함의 표시일 것이다. 하지만 뒤늦은 관심과 호기심으로 도배된 칭송은 여전히 현재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의 자기 판단과는 달리, 그 과거 궤적들을 추억의 앨범 속에서만 찾아내도록 유도하거나 구태여 묻어놓도록 강요하는 무례함으로 전도되기도 한다.

곽재용 감독은 8년간의 공백을 깨고 <엽기적인 그녀>로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거대 흥행작을 추가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엽기적인 그녀>의 상업적 성공 이후, 그러니까 ‘곽재용이 돌아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그때, 반가움의 표시이건 무례함의 호기심이건 ‘감독 곽재용’에 대해서는 좀처럼 많은 조명이 비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중요하게는, 영화감독의 일기장이라 말할 수 있는 영화 그 자체, <비오는 날의 수채화>(1989), 또는 <가을 여행>(1991), <비오는 날의 수채화2>(1993)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의 수위가 유지됐다는 사실이다. 엽기녀에 홀딱 빠져버린 광팬들도, 그 영화에 대해 숭배적이었던 글들도, 그 영화에 비수를 날리는 비평들도, 마치 서약처럼 곽재용 감독의 과거 영화들에 대한 연관성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묻지 않았다. <엽기적인 그녀>가 그의 진정한 데뷔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전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적 세계로 곽재용 감독이 들어섰으므로 그 이전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긍정이건 부정이건 분명 예외적인 일이다.

<클래식>,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이었다

곽재용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클래식>과 <엽기적인 그녀>는 연장선상에 있다. <엽기적인 그녀>는 오히려 <클래식>에서 많이 가져왔다.” 또한 “<클래식>은 성숙해진 방식으로 이루어진 <비오는 날의 수채화>다”. 일단 새겨듣자. <엽기적인 그녀>는 지나갔다. 곽재용 감독은 새로운 영화 <클래식>으로 다시 관객 앞에 섰다. <엽기적인 그녀>의 팬들은 이제 곽재용 감독의 추종자들이기도 하다. <클래식>의 광고에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할 그의 이름 석자. 그러나 <엽기적인 그녀>의 흥행요인으로 제일 먼저 손꼽혔던 것은 ‘기획력’이었다. 아마도 곽재용 감독의 지속하는 과거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일반적인 믿음에 기인할 것이다. 반면, 기획력의 성공사례로 기억되는 이 영화의 ‘엽기성’과 ‘원초성’을 동시에 돌출시켰던 장치들은 대부분 곽재용 감독 자신이 추가해넣은 소재들이다. ‘소나기 패러디’, ‘나 잡아봐라’, ‘연장전’ 등등.

“기획이라고?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영화적으로 풀어갈 것에 대해 고민했던 건 바로 나다.” 그렇다면, 기획과 감독의 장치 중 무엇이 전위에 서서 <엽기적인 그녀>의 조화를 이끌었는가? 드디어, 곽재용 감독은 <클래식>을 두고 그 대답을 들을 ‘연장전’에 돌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끊임없이 과거에서 송신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엽기적인 그녀>가 <클래식>과 이어지고, <클래식>이 다시 <비오는 날의 수채화>로 이어져 있다면 더이상 플래시백은 호사가들을 위한 것이 되지 않는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

<엽기적인 그녀>

플래시백. 그는 어릴 적 “신영균 좋아하는 놈으로 통했다”. 그래서 <빨간 마후라>를 죽어라고 보던 수원의 한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수원산성에서 영화촬영 현장 구경하기를 즐겨했다. “영화에 대한 동경심”은 초등학교 시절, 집안의 필름들을 긁어 색칠한 뒤 환등기를 만들 정도였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영사기를 직접 만드는 것에 이르렀다. 오로지 영화만 생각하던 대학 시절의 어느 날 “강의 도망치려고 문쪽에 붙어 앉아 있을 때에 안동규 대표가 찾아왔다.” 그 만남을 계기로 84년 영화패 ‘그림자 놀이’가 결성되었고, 1년 뒤 이효인씨가 결합했다. 아들의 집착만큼이나 완고했던 아버지가 아들의 인생에서 영화를 허락해준 것은 그가 청소년영화제에서 단편 <선생님 그리기>로 200만원의 상금을 받아 집에 들어왔을 때이다. 아버지의 심중을 옮기며 아마 “영화로 돈도 벌고 하니…”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입장에서 이것은 “연영과 출신이 아닌 쪽에서는 처음 상을 탄”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일은 뭐할거니> <깜동> 등의 연출부를 거친 뒤, 1989년 서른 살에 <비오는 날의 수채화>로 충무로에 발을 디뎠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물려받은 건물 하나, 그거 팔아서 만든 것”이 바로 이 영화였다. 당시 충무로 감독의 데뷔 나이치고는 젊은 편이었다. 그만큼 패기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크레인 세번 빌려 쓰고, 무지 많이 썼다고 이상하게 소문나기도 했지만, 카메라 무빙도 많이 시도해봤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다른 시도와 함께 당시로는 파격적”인 실험들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만큼 관객의 반응도 좋았다. “그 당시에 브로드웨이극장에서만 3개월, 명동과 신영 다 합쳐서 10만명 정도가 들어 그해 흥행 7위” 정도에 오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2년 뒤에 만든 <가을 여행>은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주위에서의 권유로 소설도 썼고, 양영길 기사(<비오는 날의 수채화> 1, 2편의 촬영기사)가 제작을 맡아” <비오는 날의 수채화2: 느티나무의 언덕>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8년 동안, 2001년의 <엽기적인 그녀> 이전까지 곽재용 감독은 수많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완성작을 내지는 못했다. <이중섭 시대> <우정이 사라진 거리> <락앤롤 갱> 등이 모두 제작비와 캐스팅 문제로 좌초했고, “공백기 4년 만에 제일 애정을 갖고 작업했던” 액션영화 <영웅의 이름으로>도 촬영 50% 정도를 진척시킨 상황에서 좌절되었다. 지금의 “<클래식>도 이미 98년에 써놓았던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SF멜로 <유리정원>을 기획 중이던 1999년, “신씨네에서 기획을 맡아주면 쉬울 것 같아” 찾아갔던 길에 ‘우연히’ <엽기적인 그녀>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엽기적인 그녀>의 흥행감독 곽재용이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서부터 <클래식>까지 이르게 되는 연대기적 전사는 대략 이 정도이다.

지금까지에는 당연히 빠져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의 영화의 모티브들, 거창하게는 신념들. <엽기적인 그녀>는 <클래식>의 무엇을 가져왔다는 것인가? <클래식>과 <비오는 날의 수채화>는 어떻게 만곡의 선을 이을 수 있다는 것인가? <엽기적인 그녀>에서의 느티나무 에피소드는 원래 곽재용 감독이 전만배 감독에게 써준 시나리오 <봄의 향기>에 있던 내용을 조금 바꾼 것이다. 그 시나리오 중에 “춘향을 두고 이도령이 떠나가는 장면이 있다. 이 도령은 그들이 항상 같이 있던 정자를 춘향 몰래 똑같은 다른 것으로 지어주고 간다. 날 잊어라 하는 뜻으로.” 그러니까, <엽기적인 그녀>에서 찾아올 그녀를 위해 벼락맞은 느티나무를 다시 심어주는 견우의 마음, 또는 <클래식>에서 자신이 장님인 것을 주희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준하의 마음은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정의하는 곽재용 감독의 서로 다른, 하지만 같은 버전인 셈이다. 그런 사랑은 촌스럽지만, 순수하고, 클래식하다는 것이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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