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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3]
김혜리 2003-02-14

키워드 넷. ‘내추럴’형의 유혹자

로버트 그린이 쓴 <유혹의 기술>의 분류를 응용하자면, 휴 그랜트는 ‘내추럴’형의 유혹자다. ‘내추럴’은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하며 자신의 행위가 야기할 파장에 상대적으로 무심하며 스스로의 결함과 약점을 최대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전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자. <네번의 결혼식…> 오디션장에서 “배우는 성인의 직업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한 바 있는 휴 그랜트의 가슴에는 듬뿍 사랑받고 자란 소년이 들어앉아 있다. 좋은 머리와 귀여운 외모로 얻는 호의와 사회적 혜택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서 눈꺼풀에 경련을 일으키는 소년. 1994년 매춘 스캔들이 솔직한 사과 한마디로 대중에게 쉽게 용서된 것도 돈많은 스타의 추태가 아니라 사춘기 남학생의 철없는 탈선으로 비쳐진 덕택이 컸다.

“어머니는 나와 형에게 애정을 퍼부었다. 넉넉히 사랑받으면 사랑을 공기처럼 당연시하게 된다. 문을 열고 나아가 사랑을 찾아 헤매고 싶은 욕구를 전혀 배양하지 않는 것이다. ” 그래서 휴 그랜트는 사랑에 눈물 짓고 피흘리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웃기 위해 사랑하는 로맨틱코미디의 연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이 절절한 무엇이기를 바라지만, 홍해가 갈라지고 아마존 밀림이 쓰러지는 위대한 연애만 평생 하다가는 모두 심장이 졸아붙어 죽게 될 것이다. 남성들의 판타지에서 ‘귀여운 여인’의 입지가 절대적이라면 여자들에게도 ‘귀여운 남자’가 필요하다. 연인을 엄마로 아는 마마보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귀여운 성인 남자, 두명의 어른으로서 대화가 가능하고 작은 문제는 서툴지언정 큰 문제에 대한 판단은 믿을 수 있는 남자. 그것이 배우 휴 그랜트를 위해 마련된 소파다.

<미키 블루 아이즈>

<나인먼쓰>

샌드라 불럭과 호흡을 맞춘 <투 윅스 노티스>는 워킹 타이틀에서 만든 휴 그랜트 연작에 비하면 구태의연하고, 자유주의자 여성과 재벌 2세의 만남에서 빚어지는 컬처 쇼크를 포착하는 손끝은 <미키 블루 아이즈>보다 둔하다. 하지만 <투 윅스 노티스>는 휴 그랜트의 입가 잔주름이 스크린에 불거지는 마지막 키스로 영화를 끝내지 않을 정도의 센스는 발휘한다. 진심의 확인한 두 사람은 샌드라 불럭의 집으로 와 고백의 여운을 다정하게 곱씹고자 한다. 단골 중국집에 요리를 주문하는 샌드라 불럭의 등 뒤에서 서민 가정에 처음 초대받은 백만장자 남자친구 휴 그랜트는 번잡하게 서성이며 중얼거린다.

(충격받은 듯) “음, 사실 쇼킹하오. 집이 이렇게 좁을 수가?”

(샌드라 불럭, 무시한다.)

(긍정적인 점을 발견하고) “흠, 부모님이 외출하셨기에 망정이지 더 좁을 뻔했네.”

(여자, 무시하며 통화를 계속한다)

(급기야 신이 나서) “여기 봐! 정말 끝에서 끝까지 딱 여섯 걸음이야!”

피식. 스크린 위의 샌드라 불럭이 끝내 미소를 흘리고 만다. 온 세상 여자들이 그녀와 함께 미소짓는다.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디자인 김미라·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잊을 수 없는 아니 잊기 곤란한 휴 그랜트의 장면들" 마피아처럼 말해봐! "

영어사전에 ‘floppy’(힘없이 곱슬거리는 머리모양을 뜻하는 형용사)의 예문으로까지 인용된 머리칼, 셋잇단음표의 리듬으로 깜박거리는 푸른 눈에 홀려 잊어버리기 쉽지만, 휴 그랜트는 탁월한 코미디언이다. 취향을 배제하더라도 휴 그랜트는 1994년 신인 시절 <버라이어티>가 눈썰미 있게 지적한 대로 세련된 현대 코미디가 필요로 하는, “미모와 연민을 자아내는 자학적 성향, 순발력과 안경잡이 샌님의 매력을 갖춘 배우”다. 휴 그랜트의 공으로 돌려야 할 명장면을 모았다.

1. <노팅 힐> 호텔 정킷 소동 톱 스타 안나와 재회 약속을 한 윌리엄은 차를 마시러 간 호텔에서 뜻하지 않게 신작 영화 정킷에 말려든다. 얼떨결에 <경마와 사냥> 기자를 사칭한 그와 안나는 관계자 앞에서 “영화에 말이 나오나요?” “배경이 우주 공간이라서요” 같은 억지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다 빈치’로 오해하는가 하면 다시 이탈리아 영화감독인가보다 짐작하는 윌리엄의 빈약한 연예상식 탓에 어처구니없는 인터뷰는 점점 악화된다. 어눌하면서도 반응 타이밍 계산이 번개같은 휴 그랜트의 특기를 감상할 수 있는 시퀀스다.

2. <미키 블루 아이즈> 마피아처럼 말해 봐! 사랑하는 여인이 청혼을 거절한 까닭은 그녀의 가족이 예사롭지 않은 ‘패밀리’이기 때문. 하지만 애인을 포기할 수 없는 미술품 중개인 마이클은 비장하게 메모한다. “<좋은 친구들> <카지노> <대부> 1, 2, 3편 대여할 것.” 캔자스에서 온 갱 미키 블루를 자처하지만 브루클린 식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 휴 그랜트의 또렷한 영국식 억양은 이 영화의 러닝 개그가 된다. 마피아 장인 제임스 칸이 휴 그랜트에게 “그냥 잊어버려!”(Forget about it!)와 “여기서 꺼져”(Get out of here!)를 연습시키다 좌절하는 장면이 백미. 장인은 포기했지만 사위는 포기하지 않고 줄곧 인중에 힘을 주고 턱을 내밀며 노력을 계속한다.

3. <브리짓 존스의 일기> 교양있는 영국 남자들이 싸우는 법 브리짓의 생일날. 그녀를 사이에 두고 콜린 퍼스와 휴 그랜트가 벌이는 멱살잡이는 그간 영화에서 본 모든 싸움이 몽땅 연출된 판타지였음을 여실히 입증했다. 굼뜬 반격, 지리멸렬하고 종종 비겁한 액션, 중간중간 주변의 민폐에 대한 서툰 사과까지. 훈련된 킬러인 자신이 우세했다고 주장하는 휴 그랜트는 이 장면이 교양있는 중산층 잉글랜드 중년 남자들이 할 만한 액션의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고 자부한다.

4. <어바웃 어 보이> 학예회의 피날레 조숙하지만 분위기 파악에는 서툰 소년 마커스. 우울증에 빠진 엄마를 위해 학예회에 나가 <킬링 미 소프틀리>를 부르기로 결심한다. 잔인한 또래들 앞에서 말 그대로 부드러운 사회적 자살을 감행하는 마커스를 보다못한 윌은 기타를 메고 구원에 나선다. 생전에 소원했던 작곡가 아버지의 기억과 정신적 서포트를 구하는 소년 마커스 사이에서 부유하던 윌의 정신적 매듭이 풀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자건 어린아이가 됐건 은빛 갑옷을 빛내며 구원의 손길을 뻗는 진지한 기사 역을 맡는 순간 휴 그랜트만의 매력은 끝장이라는 사실을 제작진은 잘 알고 있었고 윌은 최초의 쿨한 순간이 미지근해지고도 한참 열창을 고집하다 야유 세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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