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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2]
김혜리 2003-02-14

키워드 둘. 세속적 이기주의자

나태한 휴 그랜트가 시종일관 성실하게 멀리하는 가치가 있다면 ‘심오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연기의 열병에 감염되셨나요?” <피츠프레스>의 인터뷰어가 던진 진지한 질문에 그는 그런 병력은 없다고 대답했다. “학교 때는 여학교 학생들과 무대에 같이 오르고 남들이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이 기뻐서 연기를 했다. 나는 온갖 올바르지 못한 동기로, 돈과 명성과 얄팍한 재미 때문에 이 직업을 좋아한다.” 여러 미녀들과 스페인의 섬에서 몇주를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영화를 고른 적도 있는 휴 그랜트는 <어바웃 어 보이>의 귀족급 백수 윌과 세계관을 같이하는 남자다. 성가신 파파라치는 혐오하지만, ‘로맨틱코미디의 왕자’니 ‘가장 섹시한 수입품’이니 하는 언론이 붙여준 타이틀과 트로피에 대해서는 진지한 연기자 이미지를 해치건 말건 환영이다. 상이라면 밥상이건 뭐건 받는 편이 낫다는 주의. ‘깊이에의 강요’를 얼마나 싫어하냐면, 만의 하나 자신에게 잠재된 심오한 일면을 자극할까봐 클래식 음악도 일부러 듣지 않을 정도다.

신인 시절부터 딱히 대의를 숭상하는 박애주의자를 연기한 일이 없긴 하지만, 속된 이기주의자의 까칠한 면모를 완곡 어법을 쓰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바람둥이 다니엘 클리버는 휴 그랜트 입장에서 상당히 고마운 친구였다. “그맘때 나는 착한 남자 역할이 좀 지겨워졌고 세상 사람들도 착한 남자 휴 그랜트에 대해 약간씩 위장에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과연 다니엘은 얼마나 나쁜 남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휴 그랜트의 답은 본인의 초상과도 아귀가 맞는다. “다니엘이 악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는 10대와 대학 시절, 사회생활에 걸쳐 머리 좋고 매력있고 유머 감각이 있는 인기있는 남자였을 거다. 그러니까 여자들을 사귀기도 쉬웠을 것이고. 하지만 그에게도 삶의 가을이 온 거다.” 휴 그랜트가 볼 때 다니엘을 총체적으로 얄팍한 인간이라 부르는 일은 부당하다. 예컨대 편집인 다니엘은 아마 문학에 관해서는 진지한 전문가일 것이다. 휴 그랜트 본인처럼.

여성 관객이 보기에 휴 그랜트는 확실히 깊이가 없지만, 대신 깊이를 강요해 그와 관계를 맺는 상대를 익사시킬 위험도 없는 남자다. 정복해야 할 희망봉이 없기 때문에 그의 연인은 ‘원정대원’이 돼 고난을 같이 극복할 일도 없다. 휴 그랜트와의 연애는 삶의 보험을 들어주지는 않지만 위험한 보증도 아닐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 전부를 사랑한다”는 약속은 여자에게 주지 못해도 “나 바람둥이다. 그런데 당신과는 좀더 노력할 용의가 있다. 당신이랑 잘 안 되면 나는 누구하고도 안 될 것이다”라고 그의 브리짓에게 말할 타입이다.

엘리자베스 헐리와 휴 그랜트는 커플 시절 서로를 믿지 않는다고 공언하곤 했다. “우리처럼 많이 좋아하면 서로를 부끄럽게 만들 일은 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5년째부터 “이러다가 자칫하면, 부부처럼 되고 말겠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로부터 10년을 더 결혼반지 없이 함께했는데, 휴 그랜트가 밝힌 결혼의 이상을 보면 이해가 쉽다. “결혼에 대한 나의 이상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가다. 아내와 서로 피해다니기 충분할 만큼 널찍한 성에 살면서 아이들은 유모가 말끔히 거두고 저녁이면 세일러복을 입혀 (기왕이면 계단에서) 사열한 뒤 잠자리로 보내면 되는. 하지만 내가 현실의 좁은 집에서 아이를 들쳐업고 어질러진 장난감에 둘러싸여 있는 건 싫다. 그나저나 장난감들의 원색은 정말 눈에 거슬린다. 이기적이라고? 나도 안다. ”

키워드 셋. 회의주의자

휴 그랜트는 이기적이긴 하지만, 천성적으로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지 않는다. 순정만화적인 외모를 지닌 로맨틱코미디의 히어로이면서도 남성 관객에게 별다른 반감을 사지 않는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있을 것이다. “휴 그랜트에게는 진지하고 심각한 비즈니스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다. 그는 테이크가 끝날 때마다 ‘난 세계 최악의 배우야’라고 기분좋게 말한다. 나는 휴의 그런 무책임함을 사랑한다.” <네번의 결혼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작가 리처드 커티스의 말이다. 영화 속에서나 인터뷰에서나 그랜트는 빠른 머리회전과 위트를 내비치는 조크를 대수롭지 않게 흐린 말꼬리에 슬쩍 붙이고는 농담이 효과를 거두었는지 여부는 신경쓰지 않는다. 비난을 하면 딴청을 피우고 (“댁은 그러고도 잠이 오우?” “아, 전 파도소리를 틀어놓고 자는데요.” <투 윅스 노티스> 중에서), 칭찬을 하면 김을 뺀다(“<어바웃 어 보이>를 보면서 아내가 울다가 웃다가 하더군요. 코미디가 구하는 눈물과 웃음을 당신은 성취했군요.” “그래요…. 그런데 혹시, 부인께서 신경쇠약이신가요?” <스튜디오LA>와 인터뷰에서). 이는 실패를 끝없이 곱씹는 장광설을 도락으로 삼는 반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했다는 사실은 겸연쩍어하는 영국인 특유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초기작 <사이렌>의 존 듀이건 감독은 “휴 그랜트가 지닌 최고의 상업성은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휴 그랜트는 귀공자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겪은 우스꽝스러운 망신이나 진짜 명예와 무관한 사소한 모욕의 경험- 국제영화제에서 바지 지퍼를 연 채 기립박수에 화답했다든가 하는- 을 화제로 삼는다. 삶에서 정말 정색하고 엄숙히 취급해야 할 문제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고 말하듯이.

이 세상에 배우 휴 그랜트를 둘러싼 진지한 토론이 하나 존재한다면 아마 타이프 캐스팅과 장르적 한계에 관한 논란일 거다. 하지만 휴 그랜트는 특별히 살인마 연기를 하고 싶어서 불면증에 걸린 것 아니며 자신은 스테레오 타입의 사슬에 묶여 고통받는 위대한 배우도 아니라는 입장을 줄곧 밝혀왔다.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인물이 될 수 있는지 한계를 자연히 알게 된다.” 그렇게 직업적 야심이 소박해서 좋은 배우가 되겠냐고 혀를 차면 그랜트는 이렇게 응수한다. “수많은 인간이 타고난 소명이 아닌 일로 먹고살지만, 여전히 최선을 다하며 때로는 제법 능숙해지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도 특별히 카펫을 사랑하진 않으셨지만 팔아치우는 데에는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셨다.”

하지만 휴 그랜트의 냉소는 다정하다. 이 따뜻한 회의주의는 리처드 커티스가 쓴 휴 그랜트 3부작과 <어바웃 어 보이>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삶이 조금 허섭스러워도 괜찮다고, 빚이 늘고 골초가 돼 눈총받아도 자기 페이스만 유지할 수 있다면 세상의 끝이 아니라고 격려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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