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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1]
김혜리 2003-02-14

나쁜 남자, 사랑할까요?

서른 넘긴 지 오래인 남녀에게 요정 애칭이 거북살스럽긴 하지만, 줄리아 로버츠가 로맨틱코미디의 팅커벨이라면 휴 그랜트(43)는 오베론쯤으로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 은막에서 휴 그랜트보다 로맨틱한 코미디언, 혹은 그보다 코믹한 연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왕도 왕 나름. 요정의 왕이라고 한들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왕에게는 경배하는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하긴 휴 그랜트와 자주 비교되는 선배 캐리 그랜트도 비슷했다. 마치 이름이 정한 팔자인 양 두 사람의 그랜트는 언제나, 당연히, 지척에 있는 스타로 여겨질지언정(GRANTED), 존재해주어서 고맙다는 따위의 감격어린 치사를 받는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쓸쓸한 노릇 아닌가, 라고 굳이 염려해줄 필요는 없다. ‘배우 휴 그랜트’의 소명을 누구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은 휴 그랜트 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느 명사보다 재미있는 인터뷰를 남기면서도 의미심장한 인물로 여겨지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연기 경력 20년의 배우. 어록을 뒤적이다보면, 그라면 새 영화 <투 윅스 노티스>의 제목처럼 2주 전 통보 정도로 큰 소동없이 은퇴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배우 휴 그랜트와 그의 영화적 자아들은 비슷비슷하게 게으르고 세상사에 시큰둥하고 얼마간 경박하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왜 이 가벼운 남자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일까.

키워드 하나. 게으름뱅이

휴 그랜트는 게으르다. 도서관에서 닭고기 샌드위치를 씹으며 권태를 소재로 한 소설을 습작하는- 그는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꽤 한가한 배우였던 그를 ‘월드 스타’로 키운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에서부터 휴 그랜트는 늦잠꾸러기였다. 결혼식 들러리 주제에 늦잠을 잔 찰스는 <BBC>판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주연 같은 억양으로 아홉번이나 ‘F***!’이라고 절규하며 식장에 도착한다.

휴 그랜트 필모그래피

<특권층>(1982)<모리스>(1987)<백사의 전설>(1988)

<즉흥곡>(1988)<베니스 행 야간 열차>(1993)<비터문>(1992)<남아있는 나날>(1993)<사이렌>(1994)<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잉글리쉬 맨>(1995)<나인 먼스>(1995)<센스, 센서빌리티>(1995)<휴 그랜트의 선택>(1996)<노팅 힐>(1999)<미키 블루 아이즈>(1999)<스몰 타임 크룩스>(2000)<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어바웃 어 보이>(2002)<투 윅스 노티스>(2002)<말하자면 사랑>(2003 미개봉)

현실에서도 휴 그랜트는 미적거린다. 연기 생활 20년이 지난 요즘에도, 어쩌다 발이 미끄러져 배우가 직업이 되었다고 믿는 까닭에, 폭과 높이를 계획해 커리어의 금자탑을 척척 쌓아올린다기보다 어디 멋진 샛길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며 산다. “별로 선택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할 때 열심히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늘상 들러붙어 있다. 영화촬영은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느린 지루한 작업이다.”

휴 그랜트는 좀더 창의적인 소설, 시나리오 집필이 꿈이라고 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렇다고 결의에 불타는 재야 작가도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게으른 가난뱅이가 게으른 부자가 된 거다. 창피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도무지 규율이 없어서 무시무시한 마감에 목이 졸리지 않는 한 아마 못 쓸 것 같다!” 이처럼 나태한 천성의 그가 응급실에서 동분서주하는 의사로 분했던 <휴 그랜트의 선택>이 매우 어색한 그림을 보여준 것도 당연하다. 일하기 싫어하는 휴 그랜트는 당연히 100편의 시나리오가 오면 99개는 거절한다. 사람들은 그가 로맨틱코미디만 덥석덥석 계약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랜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로맨틱코미디영화를 거절한 배우이기도 하다. “연기를 사랑해서 일하고픈 열정으로 온몸이 불타는 배우들은 본인 역을 뺀 나머지 부분의 난센스를 못 본다. 하나 나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일하기가 싫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이 영화를 안 할 핑계, 결점만 찾게 된다.” 결과적으로, 게으름뱅이 휴 그랜트는 여왕처럼 스크립트를 고르고 작가를 닦달해 퇴고를 거듭하는 바람에 로맨틱코미디에 관한 한 높은 타율을 유지한다.

<투 윅스 노티스>

<센스, 센서빌리티>

13년간 반려자 관계를 유지한 엘리자베스 헐리와 결별 뒤에도 동료로서 옷차림과 농담에 대한 조언자로 머물고 있는 휴 그랜트는 사랑에 빠지는 데에도 상당히 게으르다. 물론 단기 데이트에는 부지런하다는 평판이지만. 진정한 사랑을 가리켜 “매우 희귀하지만 나는 그 새를 본 적이 있다”고 표현하는 휴 그랜트는 그러나 다시 사랑이라는 대역사를 시작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해한다. 귀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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